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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Oct 02. 2015

40년 전 편지가 도착했다면

잊고 살았던 나를 찾아서  <대니 콜린스>


뮤지션으로 최고의 슈퍼스타가 되고 부와 명예를 얻었다. 고급 스포츠카에 전용기에 경호원과 엘리베이터가 있는 대저택에 마흔 살이나 어린 애인에, 공연을 하면 여전히 객석은 꽉 들어차고 사람들은 그의 이름과 노래를 연호한다.


즐거울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65세 생일, 대니 콜린스(알 파치노)는 깜짝 놀랄 선물을 받는다. 그 선물은 40년 전 존 레넌이 자기에게 보낸 편지. 대니 콜린스가 음악 전문 잡지에 인터뷰 한 내용을 보고 존 레넌이 자필로 쓴 편지였다. 데뷔 시절 그 인터뷰에서 대니 콜린스는 존 레넌을 존경한다고 했고, 존 레넌의 음악과 비슷하다는 질문에 “더 없는 영광”이라고 답했다. 

돈과 명예, 모든 것을 가진 슈퍼스타 대니 콜린스.

부와 명예가 자신의 음악적 열정을 사라지게 할까 걱정이라는 그의 말에 존 레넌은 이렇게 편지를 썼다. 걱정하지 말라고. 부자가 된다고 해서 삶이나 사고방식은 바뀌지 않는다고. 함께 대화를 나눠 보자고. 편지 끝에는 전화번호까지 적혀 있었다. 


그 편지가 그때 제대로 도착했다면 대니 콜린스의 바뀌었을까? 30년 넘게 신곡 하나 내지 않고 흘러간 노래로 ‘추억 팔이’를 하며 인기와 돈을 끌어모으고 있는 한 뮤지션, 술과 마약과 여자에 빠져 살고 하룻밤 잠을 같이 잔 여자와 그 여자가 낳은 아들까지 잊고 살았던 한 남자. 그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개그맨 박명수의 말처럼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정말 늦은 것”일까. 존 레넌의 편지를 받은 후 새로운 삶을 살아보기로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쉽게 되지 않는다. 마약을 끊고, 투어까지 접은 채 소도시의 작은 호텔에서 다시 노래를 만들고, 아들의 가족을 찾지만 너무 긴 시간이 흘렀다. 데뷔 초의 대니 콜린스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늙었고, 그동안 잊고 지낸 것이 너무 많았다.

주름살은 숨길 수 없지만 여전히 소녀같은 매력을 발산하는 아네트 베닝.

◇돈 많고 늙은 슈퍼스타의 '회춘 도전기' 


영화는 어렸을 때부터 존경했던 전설적인 선배로부터 40년 만에 편지를 받고 그동안 잊고 지냈던 ‘자신’을 되찾기 위해 나서는 한 돈 많고 늙은 뮤지션의 ‘회춘 도전기’다. 이런 종류의 영화가 흔히 그렇듯 뻔한 스토리에 뻔한 결말 아니겠냐고? 맞다. 스토리는 진부하고(아들 가족의 스토리는 진부하다 못해 너무 신파조다), 눈시울 뜨겁게 만드는 감동도, 제대로 된 클라이맥스도 없다.

 
그런데도 이 영화를 ‘제법 볼 만한 영화’로 만든 힘은 대니 콜린스 역을 맡은 알 파치노와 목과 얼굴의 주름은 가릴 수 없지만 여전히 소녀 같은 매력을 발산하는 아네트 베닝이다. 그리고 영화 내내 흘러나오는 존 레넌의 노래. 알 파치노와 아네트 베닝의 웃고 울리는 연기 호흡과 존 레넌의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지불한 돈과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다. 


심지어 알 파치노는 영화 속  노래 장면을 직접 소화했다고 하는데 춤이면 춤(여인의 향기를 보라), 노래면 노래 정말 못하는 게 없다. 영화 초반 대니 콜린스가 공연하는 장면은 실제 록밴드 시카고의 콘서트 현장에서 찍었다고 한다. 더구나 술과 마약에 젖은 연기를 보노라면 그가 어쩌면 실제로도 술과 마약에 젖어 살지 않나 의심(?)이 들 정도다. 그의 초점 없는 눈빛은 초점을 잡고 똑바로 바라보는 눈빛보다 늘 강렬하다. 

40년만에 도착한 존 레넌의 편지.

또 하나는 역시 ‘실화’의 힘이다. 영화에서는 대니 콜린스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한때는 뮤지션이자 지금은 음반 제작자로 살고 있는 스티브 틸스턴이 주인공이다. 스티브는 실제 영국에서 촉망받던 싱어송라이터였고, 영화에서처럼 인터뷰를 했으며, 그로부터 34년이 지난 2005년 한 수집가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그렇게 스물한 살 때 받았어야 할 존 레넌의 편지를 쉰다섯 살이 돼서야 받게 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스티브는 영화 속 대니 콜린스처럼 그렇게 슈퍼스타가 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존 레넌의 편지를 받고 큰 충격과 감동을 받은 영화 속 대니 콜린스와 달리 스티브는 “34년 전에 편지를 받았다면 당신의 삶이 달라졌겠냐”는 질문에 그냥 웃고 말았다는 후문이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스티브의 실제 모습을 보고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억지 눈물, 억지 웃음 없이 '힘 빼고' 감동


신파로 흐를 수 있는 뻔한 스토리를 괜찮은 감동 스토리로 만든 결정적 힘은 ‘힘 빼기’다. 억지로 눈물을 쥐어짜는 장면도, 억지웃음을 유발하는 장면도 없다. 돈과 술과 마약에 절어서 그렇지 대니 콜린스가 실제로는 좋은 사람이란 걸 보여주기 위해 보여주는 몇몇 판타지 요소가 눈에 거슬리지만 배우들의 연기로 그런 어색함을 녹인다. 

관객이 듣고 싶은 노래를 할 것인가, 내 노래를 할 것인가. 대니 콜린스는 고민한다.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지, 내가 살려고 있던 삶이 무엇이었는지, 혹은 어떤 삶을 살든 나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는지 고민하며 살아야 하지만 그럴 기회가 흔치 않다. 영화를 보는 순간만이라도 그런 고민을 잠시 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내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누군가를 진정으로 용서하고 싶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다(누구보다 나. 그래서 즐겁게 봤고, 보는 동안 만큼은 즐거웠다).

내일도 어찌 될지 모르는 삶에서 40년 후면 너무 길다. 변해야 한다면 지금 당장,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면 지금 당장 하라고 영화는 말한다. 존 레넌과 견줄만한 사람에게 40년 아니라 400년이 지나도 편지 받을 일 없는 우리 같은 범부로서는 엄청난 용기를 발휘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물론 그마저도 쉽지 않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 검진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아들에게 대니 콜린스는 특유의 농담을 던진다. 의사의 습관을 살펴보니 좋은 얘기를 전할 때는 이름을, 나쁜 얘기를 부를 때는 성을 부르더란다. 분명히 이름을 부를 테니 용기를 내서 기다려보자고. 드디어 의사가 문을 열고 아들을 부른다. 이름이었을까, 성이었을까? 그건 영화를 직접 보고 확인하시라. 


by 책방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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