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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Oct 06. 2015

나는 <인턴>이 불편했다

그리고 비겁한 영화 <인턴>

※이 글에는 스포일러뿐 아니라 약간의 분노까지 담겨 있으니 이 영화를 따뜻하거나 재미있게 보신 분, 혹은 그런 영화라고 생각하며 보실 예정인 분 들은 이 글을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인턴>은 비겁한 영화다. 그리고 불편한 영화였다. 세상에 더없이 착한 사람들만 모아놓고 마치 그곳에 엄청난 갈등이라도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한다. 

우선 우리의 자랑스러운 주인공이자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한 70세 노인 인턴 벤. 경험 많으면서도 누구를 가르치려는 꼰대도 아니고, 또래(혹은 조금 어린)의 여자들에게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아직은 서툴지만 IT 기기나 페이스북 등 SNS에도 기꺼이 도전한다. 직장 동료의 연애 상담은 물론이고 회사 대표의 운전기사이자 멘토 역할까지 척척이다. 갈 곳 없는 직장 동료에게 자신의 집도 기꺼이 내준다. 늘 슈트를 고집하며 한 치의 흐트러짐도 허락하지 않는 그의 패션은 또 어떤가. 천사 슈퍼맨이 강림하셨으니 그가 바로 벤이다. 


70세의 인턴 벤. 그는 천사 슈퍼맨이다.


창업 1년 반 만에 직원 220명의 성공신화를 이룬 줄스(앤 해서웨이)는 또 어떤가. 회사 사장이면서도 어떤 형식이나 권위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직원들과 둘러서 피자를 먹고 회사 내에서는 운동 겸 자전거로 이동한다(그럴 만큼 넓은 회사도 아니고, 오히려 방해만 될 것 같은데 사무실에서 자전거를 탄다). 이동하는 자동차 안에서도 끊임없이 업무를 보는 억척 여성이지만 집에서는 아이와 남편을 너무 사랑하는 평범한 아내다. 자신을 위해 기꺼이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 남편(잠시 후에 남편 얘기는 다시 하기로 하자)’을 선택한 남편이 이웃집 여자와 바람이 나자 자기 탓이라고 마음 아파한다. 천사 원더우먼이 따로 없다. 

직원들도 온통 천사표다. 경쟁자가 생기자 그 사람에게 “자기가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도 사장이 몰라준다”며 울음을 터뜨리고, 신입과 (나이 많은) 인턴을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사람들인 양 환대한다. 줄스의 남편은 사랑하는 아내의 성공을 위해 잘 나가는 회사를 때려치우고 기꺼이 육아와 가사를 책임지고, 벤을 짝사랑하는 할머니는 벤이 다른 여자와 장례식장에 나타나자 손가락 욕 한 번 날려주는 것으로 쿨하게 작별을 고한다. 줄스의 알코올 중독자 운전기사는 줄스의 협박 같지도 않은 협박, 따끔한 경고 한 마디에 기꺼이 운전대를 양보한다. 또 누가 있더라? 하여간 이 영화는 온통 천사들뿐이다.

     

30대의 성공한 여성 줄리. 그는 천사 원더우먼이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세상인데도 억지로 문제를 만든다(그래도 영화 줄거리는 있어야 하니까). 잘 나가던 여성 줄은 전문경영인을 영입하라는 투자자들의 압박에 시달리고(시달렸나? 기꺼이 거절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 시달림을 넉넉하게 받아주기로 한다. 왜냐. 줄은 천사이자 원더우먼이니까), 남편은 바람을 피운다(잘 나가는 아내를 보며 외로워서!). 아이를 태워주고 태우고 오는 것도 이 영화에서는 아주 심각한 문제이다. 이런 아주 심각한 문제들로 줄스는 고민하고 심각한 내적 갈등 겪는다. 가끔 외롭기도 해서 함께 출장을 간 우리의 인턴 벤에게 함께 침대에 앉아 TV를 같이 봐달라고 부탁할 정도다. 


너무 걱정 마시라. 온통 천사들만 있는 세상에서 이런 일들이 뭐가 그리 문제란 말인가. 그냥 다 해결된다. 정말이다. ‘그냥’ 다 해결된다. 그것도 아주 따뜻하게 모든 문제와 갈등이 해결된다. 이 영화에서 말하고 싶은 게 바로 이거다. 세상은 천사들만 사는 세상이니 너무 걱정 마세요. 당신의 회사? CEO?, 직장 동료? 다들 천사예요. 인턴이면 어떻고, 나이가 많으면 어때요? 기쁜 마음으로 출근해보세요. 내일은 당신보다 훨씬 젊은 안마사가 느닷없이 나타나 당신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을 테니까요. 

배우자가 바람이 나셨어요? 너무 걱정 마세요. 잠시 외로웠을 뿐이니까. 곧 돌아올 거예요. 당신이 무슨 노력을 해야 하느냐고요? 할 일 없어요. 그냥 혼자 깨우치고 뉘우친 뒤 당신 앞에서 눈물을 흘릴 거예요. 용서해달라고. 그런데 이웃집에서 할 일 없이 집 안 일이나 하고 애들이나 보는 전업주부들은 조심하세요. 당신의 그 착한 남편을 언제 꼬드길지 모르고, 당신의 일과 옷이나 뒤에서 흉보는 사람들이니까(실제 이 영화에서 가장 한심하고 ‘나쁜’ 사람들은 이웃집 가정주부들이다. 감독이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온통 천사들만 있는 세상, 그래도 감독은 문제를 만든다. <이상 사진 출처=워너브러더스코리아>


감독이 누군가 하고 봤더니 낸시 마이어스라는 감독이다. 듣보잡인데 <왓 위민 원트>의 감독이라니 좀 알겠다. <왓 위민 원트>도 말도 안 되는 영화지만 그래도 아예 처음부터 판타지를 표방하고 나섰으니 꽤 유쾌하게 봤는데, 이 영화는 제법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드라마인 것처럼 이것저것 장치를 만들어놓고 게다가 교훈까지 주려고 폼을 잡는다. 물어보고 싶다. 감독님, 혹시  사회생활해보셨어요? 전업주부로 살아 보셨어요? 감독의 말 같지 않은 철학을 영화에 드러내려다 이것저것 왜곡시켜 놓더니 “회사는, 일은, 직장은, 가정은, 심지어 나이는, 너무 걱정 마세요. 이렇게 다들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라고 끝내버리는 이 영화, 불편했다. 비겁한 영화다. 

이 영화에서 나이 많은 인물이 몇몇 등장하지만 꼰대는 없다. 유일한 꼰대는 이런 영화로 어쭙잖게 교훈이라도 주고 싶어 하는 감독 자신이다. 그리고 최근 들어 아무 영화에나 닥치는 대로 출연하는, 특히 이 영화에서는 시종 일관 '아빠 미소' 외에는 어떤 연기도 보여주지 않는 로버트 드니로(한때는 그가 출연하는 영화는 꼭 봐야 할 영화로 분류됐는데, 언제부터인가 보지 말아야 할 영화로 분류된다)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다. 


요즘 한국에서도 개봉한 <대니 콜린스>의 알 파치노를  보라고.  

by 책방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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