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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Dec 29. 2015

그들도 사랑의 방정식은 풀지 못했다

이성의 과학, 감성의 사랑은 양립 가능한가 <과학자의 연애>

그는 마차를 보지 못 했다. 비를 막기 위해 기울인 우산이 시야를 가렸다. 달려오던 말이 그를 치었다. 설상가상으로 마차에서 쏟아진 짐들이 그를 덮쳤다. 1906년, 47세의 피에르 퀴리는 그렇게 허망하게 눈을 감았다. 마리 퀴리의 나이 39세 때의 일이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한 부부이자 든든한 연구 파트너였다. 마리 퀴리는 꼼꼼하면서도 결단력이 있었다. 폴로늄과 라듐을 추출해 원소로 확정하는 일을 맡았다. 반면 피에르 퀴리는 느리지만 신중한 성격이었다. 방사선의 정체를 밝히는 일은 그의 몫이었다.


1903년 스웨덴 노벨위원회가 선정한 노벨 물리학상 후보는 베크렐과 피에르 퀴리였다. 마리 퀴리의 이름은 없었다. 아내가 후보에서 제외됐다는 소식을 들은 남편은 깜짝 놀라 편지를 썼다. “이 연구는 저와 마리 퀴리의 공동 연구이며, 이 연구에서 마리 퀴리가 한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노벨상을 받는다면 마리 퀴리도 마땅히 함께 받아야 합니다.” 노벨위원회는 이런 남편의 노력을 받아들였고 퀴리 부부는 나란히 그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다.


상대적이면서 절대적인 사랑의 힘


“나의 사랑, 나의 빛, 나의 태양! 내 손을 잡아주던 당신의 작은 손이 그립고,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던 가녀린 두 팔이 그립습니다. 그러나 제일 그리운 것은 당신의 그 타는 듯한 입술입니다(p19). 아인슈타인이 밀레바 마리치에게 쓴 연애편지의 일부다.


아인슈타인은 1905년 한 해에만 광전 효과, 브라운 운동,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했다. 과학 역사에서 1905년은 ‘기적의 해’로 불린다. 특허청 직원으로 일하며 틈틈이 연구를 하고 논문을 썼던 아인슈타인이 이렇게 놀라운 업적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은 취리히대학교 동문이자 아내였던 밀레바의 든든한 지원이 있었다.


아인슈타인. 그에게 밀레바는 아내이자 든든한 지원자였다. 


실제 밀레바는 특수상대성이론 논문을 검토해 7곳의 오류를 수정했다.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역학적 특성에 대하여’라는 소박한 제목을 달아준 것도 그녀였다. “빛의 속도가 일정한 우주에서는 관측자의 운동 상태에 따라 시간과 공간이 변한다”는 혁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겸손한 제목을 붙인 것은 기존 학계에 도전한다는 인상을 피하기 위한 밀레바의 세심한 배려였다는 후문이다.


이번에는 과학자들의 사랑이다. <과학자의 연애>는 인류의 지성사, 예술사, 정치사를 뒤흔든 연애 이야기를 다룬 ‘세상을 바꾼 그들의 사랑’ 시리즈 네 번째 책.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밀레바 마리치(박병철),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박민아), 엔리코 페르미와 라우라 페르미((이은희), 제인 구달과 휴고 반 라윅(홍승효), 앨런 튜링과 남자들(이인식), 에밀리와 볼테르(최세민) 등 6명의 과학저술가가 인류 과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과학자 6명의 사랑과 삶, 그리고 그들의 내면세계를 그렸다.


이성의 ‘과학’·감성의 ‘사랑은 양립 가능한가


과학자들의 사랑과 연애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이러한 과학과 사랑의 본질이 아니라 그 사이를 연결하는 ‘가교’의 발견 가능성 때문이다. 어느 평론가의 책 제목처럼 ‘아주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 과연 가능하냐는 것이다.

결국 부질없는 기대였다. 숨겨진 우주의 법칙을 밝히고 인류가 수백 년 동안 풀지 못한 난제를 해결한 그들이었지만 연인의 마음만큼은 제대로 헤아리지 못 했다.. 숱하게 반복되는 실험으로 심신이 망가지는 극한 상황도 이겨냈지만 사랑 앞에서는 그들도 조급했고 인내심이 부족했다. 때로는 이성이 마비되기도 했다.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 부부. 


실제 마리 퀴리는 새로운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했지만 사랑의 ‘반감기’는 급속히 줄어들었다. 남편이 마차에 치여 사망한 이후 마리 퀴리는 물리학자 폴 랑주뱅과 새로운 사랑에 빠졌다. 피에르 퀴리가 그랬던 것처럼 랑주뱅 역시 사랑하는 연인이자 연구 파트너였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도 있었다. 랑주뱅에게는 아내와 네 아이가 있었던 것이다. 1911년 그들의 ‘불륜’은 신문에 대서특필되었고 우파 언론의 정치공세로 이어지면서 ‘소르본 스캔들’로 비화되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방정식(E=mc2)을 고안하고 현대 물리학을 새로 쓴 아인슈타인 역시 ‘사랑의 방정식’ 만큼은 잘 풀지 못 했다. 좋은 과학자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좋은 남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인슈타인이 과학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승승장구하는 동안 밀레바와의 관계는 급속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아인슈타인이 네 살 연상이자 이종사촌이었던 엘자와 가까워지자 밀레바는 아이들을 데리고 떠난다. 그들의 부부관계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국내에서도 개봉됐던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주인공 앨런 튜링의 사랑은 더욱 비극적이었다. 천재 수학자였던 그는 남자를 사랑했다. 독일군의 애니그마 암호를 해독하고 컴퓨터의 시초를 개발하지만 그는 동성애자를 성추행했다는 혐의로 화학적 거세 판결을 받는다. 호르몬 투입으로 그는 치명적인 신체 변화를 겪게 된다. 발기불능이나 중추신경계 손상뿐이 아니었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1954년 6월 튜링은 수학자답게 자신의 목숨을 끊을 수 있을 수 있는 청산가리 분량을 계산해 사과에 주사하고 그것을 먹는다. 그의 나이 42세였다.


사람마다 사랑의 유형이 제각각이듯 과학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과학자들의 사랑이 실패로 끝난 것은 아니다. 엔리코 페르미와 라우라 페르미 부부는 스승과 제자의 사이로 만나 연인으로 발전했고 평생 부부로 살았다. “비범한 기억력의 소유자였던 페르미는 늘 참고 문헌도 뒤적이는 법 없이도 막힘없이 물리학 이론들을 쏟아냈고, 라우라는 천재 물리학자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암호를 일상의 언어들로 바꾸어 종이에 적어 내려갔다(p102)”


그들에게 복잡한 방정식과 수학적 기호들은 달콤한 밀어(密語)였고 사랑의 세레나데였다. 이들의 사랑을 갈라놓은 것은 죽음이었다. 암 판정을 받은 페르미는 병실에 누워서도 정맥 주사액의 방울 수를 세고 영양분과 수분의 공급량을 측정했다고 한다. 아내 라우라는 그녀를 위해 마지막 선물을 준비했다. 그것은 바로 <원자가족, 엔리코 페르미와 함께한 나의 삶>이라는 책이었다. 죽는 순간까지 물리학자로 살았던 남편을 위해 자서전을 헌사한 것이다.


제인 구달의 가장 친한 친구는 침팬지였지만 반 리윅 역시 믿음직한 동료이자 연인이었다.


제인 구달에게 반 라윅은 믿음직한 동료였으며 연인이었다. 그들의 사랑이 늘 아름다웠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사랑은 영장류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발견의 자양분이었다. 18세기에 살았던 에밀리와 볼테르 역시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불륜’이었으나, 그들의 사랑은 욕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과학적·문학적 재능을 넓혀준 필요충분조건이었다.


()와 나 사이에는 과학이 있었어요


노벨 물리학상에 이어 노벨 화학상까지 수상하지만 ‘소르본 스캔들’은 마리 퀴리의 삶에 큰 생채기를 남긴다. 한때 스캔들 논란이 거세지자 노벨위원회는 마리 퀴리의 노벨 화학상 선정을 철회하려고 했다. 노벨상 수상을 스스로 거절해줬으면 좋겠다는 편지를 받고 마리 퀴리는 이렇게 답장을 보낸다.


“제가 보기에 당신이 조언해주신 행동은 심각하게 잘못된 것처럼 보입니다. 노벨상은 라듐과 폴로늄 발견에 대해 주어진 것입니다. 저의 과학 연구와 사생활은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과학 연구의 가치를 인정하는 일이 사생활에 대한 중상모략과 명예 훼손에 영향을 받는다는 생각을 저는 원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p77).” 결국 마리 퀴리를 버티게 한 힘은 사랑이 아니라 과학에 대한 열정이었다.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세기의 연이이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진보주의자들답게 계약 결혼을 하고 평생을 동지이자 연인으로 살았다. 사르트르의 여성 편력은 그의 사상만큼이나 유명했다. 그런 그를 보부아르는 용서했다. 둘의 관계에서 ‘육체’는 우선순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년의 보부아르는 사르트와의 관계를 요약했다. “사르트르와 나 사이에는 늘 말이 있었어요.”


과학자들은 든든한 연구 파트너이자 연인이었던 상대에 대해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늘 과학이 있었어요.”


by 책방아저씨 https://facebook.com/booksboo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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