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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Feb 11. 2016

사랑은 눈빛으로 말하는 것

영화 <캐롤>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한 여인이 있다. 우아하며 무엇보다 부유하다. 딸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들른 백화점에서 자석처럼 끌리는 한 사람을 만난다. 어디선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그녀는 그 시선의 발원지에 망설임  다가간다. 주인공은 백화점 점원. 손님과 점원의 의례적인 대화를 나누지만, 그들은 어떤 연인보다 뜨거운 눈빛을 교환한다.


 여인이 있다. 부유하지 않지만, 젊고 매력적이다. 일하고 있는 백화점에서 한 손님을 발견한다. 장난감을 고르던 그 손님도 그녀를 바라본다. 딸의 선물을 고르고 배송 주소를 불러주고 계산을 마친 뒤 총총히 사라졌지만, 장갑을 남겨두고 간 손님. 그녀는 장갑을 바라본다. 짧은 시간 마주쳤던 손님의 눈빛을 생각한다.


둘은 사랑에 빠진(것이)다.


백화점에서 만난 테레즈(왼쪽)과 캐롤. 의례적인 대화를 나누지만, 뜨거운 눈빛을 나눈다. 사랑에 빠진 것이다.   


◇오직 그 사람만 보이는 순간


<캐롤>은 '사랑은 눈빛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영화다.


처음 마주친 백화점에서 서로의 이끌림을 확인한 순간도 눈빛이었다. 대화는 그저 그 눈빛을 더 오래 교환하기 위한 핑계였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주인공들의 마주친 눈빛은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결코 미래는 밝지 않다. 지금보다 더 행복할 것이라는 확신도 없다. 그래도 서로를 선택했다. 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모든 감정을 눈빛으로 함축해 보여준다. 이 영화는 해피엔드인가? 잘 모르겠다.


사랑은 눈빛이라고 말하는 장면의 백미는 캐롤(케이트 블란쳇)과 테레즈(루니 마라)가 함께 차를 타고 처음 캐롤의 저택으로 향하는 장면이다. 차 안 가득 음악이 흐른다. 배경음악과 카오디오의 음악 소리가 포개진다. 행인, 도로, 터널, 차창 밖 풍경이 음악을 타고 지나간다. 룸미러와 핸들, 장갑 낀 케롤의 손이 클로즈업된다. 오직 둘만의 시간. 시선으로(영화에서는 물론 카메라 앵글이지만)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급기야 테레즈는 카메라로 캐롤의 모습을 담는다. 사진은 사랑하는 사람이 찍어줄 때 가장 예쁘고 아름다운 법. 캐롤은 그런 테레즈에게 카메라를 첫 선물로 사준다. 명심하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카메라에 담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딸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기 위해 백화점에 들어선 캐롤.
수많은 사람 속에서 캐롤을 발견한 테레즈.


동성애라는 '금기'를 직접적으로 다뤘다는 것이 이 영화의 힘이다. 동시에 두 여인의 사랑이 전혀 '동성애스럽지' 않다는 것도 이 영화의 힘이다. 동성애를 다뤘으면서도 전혀 동성애 이야기 같지 않은 영화. <검사외전>이 전국 상영관의 70% 이상을 점유하며 물량공세를 하고, <쿵푸팬더3>가 겨울방학 특수를 톡톡히 맛보고 있는 가운데서도 <캐롤>이 만만치 않은 입소문의 저력을 과시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이 영화가 국내에서는 다양성 영화로 취급받지만, 미국 아카데미 6개 부분과 영국 아카데미상 최다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고 호주 아카데미상에서는 두 배우가 나란히 여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이런 점을 상기한다면 이 영화를 대하는 국내 개봉관들의 태도는 너무 야박하게만 느껴진다.


◇왜 사랑에 빠졌냐고 묻지 말자


이 영화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남자들'이다.


영화 속 남자들은 대부분 속물이거나 찌질하다. 홍상수 영화에서의 남자들과 닮은 구석이 많다. 캐롤의 남편은 캐롤에게 평범한 주부, 평범한 아이 엄마로 돌아오기를 강요한다. 애원하다가 윽박지르고 급기야 흥신소 직원까지 동원하는 대목에서는 할 말을 잃는다. 테레즈의 애인 역시 테레즈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구애를 받아줄 것을 강요한다. 그 강요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순간 분노를 터뜨리고 급기야 다른 여자를 찾는다.


캐롤의 남편은 캐롤이 평범한 주부, 엄마로 돌아오길 강요한다.
테레즈의 남자친구는 테레즈가 평범한 연인이 되기를 강요한다.


그래도 상관없다. 남자들은 철저하게 조연일 뿐이다. 그들의 사랑(혹은 사랑이라고 믿은 행위)은 캐롤과 테레즈의 삶, 그리고 선택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오히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동기만 부여할 뿐이다. 캐롤의 남편이 "나는 캐롤을 사랑한다"고 칭얼거리자 캐롤의 친구는 이렇게 쏘아붙인다.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고요."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옆에 두고 왜 다른 사람, 그것도 동성과 사랑에 빠졌냐고 묻지 말자. 이 영화도 묻지 않는다. 관심도 없다. 왜냐고? 누군가에게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떤 필연성도 개입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속 이런 대사처럼. "그 사람에게 끌리거나 끌리지 않는 이유는 알 방법이 없어. 우리가 아는 건 그 사람에게 끌리느냐 아니냐 뿐이야."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사랑을 확인하는 중요한 매개체이자 소품으로 등장한다.


이 영화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사랑. 누군가 사랑에 빠지고 행복한 시간을 갖다가 파국을 맞고 그러다가 다시 위기를 극복하는 그 흔한 사랑 이야기지만 진부하지 않다. 같은 여성 간에 피어난 사랑이라는 것도 느낄 수 없다.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오로지 사랑에 빠진 두 사람만 스크린에 있을 뿐이다.


그 사랑은 눈빛으로 시작된다. 누군가에게 사랑에 빠진다면 너무 많은 것을 주거나 받으려 하지 말자. 캐롤이 테레즈를 바라볼 때의 눈빛, 테레즈가 캐롤을 바라볼 때의 눈빛으로 족하다. 그것만으로도 사랑은 충만하다. 오래간만에 가슴 아픈,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 한 편 감상했다.


p.s : 어쩔 수 없는 속물인가. 영화가 끝난 후 자꾸 캐롤이 테레즈에게 준 카메라가 눈에 밟힌다. 탐나더라.   


by 책방아저씨 https://facebook.com/booksboo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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