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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Mar 09. 2016

나의 오스카 필모그래피

내가 본 2016 아카데미 수상작  

어쩌다 보니 그리됐다. 12월부터 최근까지 1주일에 한 편 정도 영화를 본 것 같다. 물론 그중에는 차라리 안 보는 게 좋았을 영화도 있다(재미있게 본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레전드나 13시간처럼). 대부분은 좋았다. 


시작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었던 것 같다.  아무런 정보도, 기대도 없이 본 시카리오는 2015년 '내가 본 최고의 영화 톱 5'에 들기에 손색이 없는 영화였다. 내부자들:디 오리지널은 다른 편집판이 나와도 또 보게 될 것이다.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었을 스타워즈:깨어난 포스도 있었다. 


1월은 더 풍성했다. 레버넌트를 시작으로 유스, 헤이트풀 8, 캐롤, 데드풀, 스티브 잡스, 대니쉬걸에 이어 가장 최근에 본 스포트라이트, 사울의 아들, 룸까지. 우연히 대부분 아카데미상 후보작이었고, 대부분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의도하지 않게 자체적으로 '오스카 영화제'를 치른 셈이다. 


이 기간 본 영화 중에 아카데미상 수상작만 짧게 정리했다. 한편씩 써도 할 말이 많은 영화들이지만, 이렇게 한꺼번에 정리하는 것은 순전히 나의 게으름 때문이다.


작품상을 받은 <스포트라이트>. 


◇보는 내내 가슴이 뛰었던 <스포트라이트>


혼을 쏙 빼놓는 할리우드 표 액션도 없다. 클라이맥스도 밋밋한 편이다. 잠깐씩 개인사와 갈등이 등장하지만,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영화는 진실을 향해 달려가는 기자들의 모습에만 주목한다. 영화 속 기자들은 자기들의 역할에 충실하다. 사장은 개입하지 않으며 편집국장은 큰 방향만 잡는다. 위아래를 조율하고 팀원들을 진두지휘하는 것은 팀장이다. 팀원들은 자신의 장점을 발휘해 취재원에 접근하고, 진실에 접근하며, 새로운 팩트를 찾아낸다. 


모든 것이 밝혀지는 순간(취재팀에 전화가 쇄도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잔잔하지만, 보는 내내 가슴이 뛰었다. 아카데미상 시상식 이후 이 영화를 봤다. 왜 이 영화가 작품상을 받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영화관 문을 나섰다. 


감독상과 남우주연상, 촬영상에 빛나는 <레버넌트>.


◇디카프리오를 위한 <레버넌트>


솔직히 이 영화가 그렇게 찬사를 받을지 몰랐다. 그렇게 많은 상을 받을지도 몰랐다. 사족을 달고 싶은 생각은 없다.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감독상을 받고, 디카프리오니까 남우주연상을 받고, 루베츠키가 촬영상을 받았다는데 어떻게 트집을 잡겠는가. 


이냐리투와 루베츠키는 이미 버드맨에서 연출과 촬영감독으로 호흡을 맞췄다. 지난해 나란히 같은 상을 받았다. 놀라지 마시라. 그래비티의 촬영감독도 루베츠키였다. 앞으로 영화를 고를 때 배우, 감독에 이어 촬영감독까지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레버넌트 영화 얘기는 생략하자. 한 마디만 하자면 디카프리오, 이 영화에서 정말 고생했다. 그것만은 인정!  


여우주연상의 <룸>, 아쉬운 영화였다.


◇여우주연상 수상작이 의심스러운  <룸>


아카데미상 수상작이기 때문에 본 유일한 영화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여우주연상을 받을 만큼 입체적인 연기도 아니었다. 물론 고생한 것은 안다. 7년 동안 고립된 방에 갇혀 있었던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한 달 동안 고립된 방에서 생활했다는 후문도 들린다. 그게 전부다. 


여주인공의 연기가 그리 빛나 보이지 않는 것은 영화 때문이다. 극적 긴장감이나 방에서 풀려난 이후의 상처, 갈등, 극복 과정도 단선적이다. 그러고 보니 돋보인 것은 유일하게 여주인공의 연기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언제부터 아카데미 주연상이 영화는 엉망인데 주연 배우의 연기만 좋았다고 주는 상이 되었는가.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사울의 아들>


◇고통스러운 소리의 <사울의 아들>


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카메라가 주인공의 얼굴만을 쫓는다. 나머지는 모두 영화의 배경으로 처리된다. 주인공 얼굴 저 너머로 홀로코스터의 비극이 마치 배경 화면처럼 끝없이 이어진다. 줄지어 이동하고, 옷을 벗고, 가스실로 들어가고, 시체를 치우고, 다시 '처리될 물건'이 줄지어 이동한다. 


영상은 잔혹하고 비극적이지만, 그저 배경 화면이다. 그 배경이 더 강렬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소리 때문이다. 끝없이 들려오는 소리. 고통스러운 소리가 영화 내내 계속된다. 홀로코스터를 다룬 영화는 많다. 하지만 이처럼 독특하게 만든 영화는 많지 않다. 여러 면에서 <인생은 아름다워>의 정반대 지점에 있는 영화다. 물론 주제는 같다.  


여우조연상을 받는 <대니쉬걸>.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대니쉬걸>


모든 것에는 처음이 있다.  1930년 최초의 성전환 수술자는 에이나르 베게너였다. 그는 화가였다. 그의 성 정체성을 찾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은 다름 아니라 화가이자 아내였던 게르다 베게너였다. 게르다 베게너는 남편(?)을 모델로 수많은 그림을 남겼다. 이 영화는 이들의 실화를 다룬 영화다. 영화를 보고 나서야 이 사실을 알았다. 


여우조연상을 받은 게르다 베게너 역의 알리시아 비칸데르 연기도 좋았지만, 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아 모든 것을 던지는 에이나르 베게너 역의 에디 메드레인의 연기가 더 좋았다. <레미제라블>에서도 나왔다는데 언뜻 기억이 날 것도 같다. 어떤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고.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그들의 삶에도 꽃이 피었다. 하지만 모든 꽃은 지게 마련이다. 


음악상을 받은 <헤이트풀 8>.


◇역시 쿠엔틴 타란티노 <헤이트풀8>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에 아카데미상은 아무 의미가 없다. 어떤 상을 받든, 혹은 아무 상도 받지 않았든 타란티노의 영화는 그저 타란티노의 영화일 뿐이다. 이번에도 관객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대사로 극도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어떤 영화도 따라 할 수 없다. 


음악이 좋았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서 음악은 이미 <킬 빌>에서 정점을 찍었다. 조수미가 출연해 화제를 모았던 <유스>가 음악상을 타지 못해 아쉽다는 평을 봤다. 나는 조금도 아쉽지 않다. 


<스파이 브릿지>에서 스파이로 열연한 마크 라일런스.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영화는 별로였지만, <스파이 브릿지>


영화는 별로였다. 놀라운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다. 적국의 스파이에게조차 변호사를 붙여주는(그게 자유민주주의 국가 과시용이든 뭐든) 나라. 변호사는 그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나라. 그게 냉전이 최고조에 달하던 1950년대 말이었다는 점이 더욱 놀랍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것은 '테러방지법'과 같은 법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헌법 정신과 이를 기반으로 한 튼튼한 시스템이다. 


공교롭게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헤이트풀 8>을 빼고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이다. 사실에서 주는 힘은 상상력도 넘보지 못한다. 사실을 어떻게 보여주느냐는 감독과 배우의 몫이다. 사실보다 더 사실처럼 보이게 하는 힘이 필요하다. 그렇지 못하면 더 힘 빠진 영화가 된다. 할리우드는 그것을 뛰어넘는 노하우를 완벽하게 체득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을 입증한 것이 이번 아카데미상 시상식이었다. 


by 책방아저씨 https://facebook.com/booksbooster


※이 밖에도 매드맥스:분노의 도로는 편집상, 미술상, 의상상, 분장상, 음향편집상, 음향효과상 등을 받았다. 엑스 마키나는 시각효과상, 007 스펙터는 주제가상, 인사이드 아웃은 장편 애니메이션상, 빅쇼트는 각색상을 각각 수상했다. 아쉽게도 빅쇼트를 보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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