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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7, 38] 인턴 출근하고 이력서 쓰는 일상

늘 쉽게 울리는 화재 경보 알람/ 새로운 인턴분들 면접/ 산책

by 소마


새로 들어온 집에 동양인이 나밖에 없는 관계로 문밖을 나가면 누군가를 만나고, 또 한마디라도 더 붙여야 한다는 것에 약간은 압박감을 느끼는 요즘. 나는 그냥 내 볼 일을 보고 들어가고 싶은데, 왠지 이곳은 스몰토크로써 근황을 물어봐야 하는 게 예의인 느낌이라 멘탈이 버틸 수 없을 때는 그냥 문밖이 조용하여 아무도 없는 것이 제법 확실할 때 방을 나가는 것으로 슬그머니 합의를 보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그 소소한 근황 인사 같은 것이 스트레스라기보다도, 그저 지금 내가 여유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같이 사는 플랫 메이트들이 모두 다 친절하지는 않을지라도 마음은 좋은 친구들이라는 건 알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 또한 든다.


가만히 책상에 앉아 (사실) 내심 고군분투하며 주인아저씨가 뚝딱 뚝딱 만들어준 이 공간에서 몇 개 올라오지 않은 이력서를 돌리는 일상들이 그렇게 평화롭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어떤 날은 평일인데도 회사를 안 가도 된다는 사실이 조금은 좋게 느껴지다가도, 올라오는 공고들을 보고 있자면 다시 한번 현실과 마주하곤 한다. 나는 스스로를 늘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서른이 된 인생에서 두 번째로 온 영국과 외국은 어쩌면 새로운 즐거움이라고 정의 내리기보다는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일이 더 많은 것 같다. 영국의 좋은 점보다는 나쁜 점도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있는 요즘의 매일.


어쩌면 당연하고도 이상한 그런 기분이다. 조금 덜 설레다니 그럴 수도 있구나.





1. 소포 받기가 어려워
- 님아 돌아가지 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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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배달을 주문한 소포가 또다시 돌아갔다.


좀도둑이 잦은 영국에서는 소포를 그냥 밖에 잘 두고 가지 않는다. 한국인은 치안상 위험하다는 건 알지만 일 처리가 내심 (아니 확실히) 답답하다. 내 소포 제발 돌려줘라 줘. 하루 종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일 온다고는 하는데 나는 내일 인턴일 때문에 또 출근 아닌 출근을, 그것도 주말에 해야 하는 실정이라 받을지는 미지수다. 집에 누군가가 있기를 바라며. 가끔 플렛 친구들이 감사하게도 받아주고는 하니까.





2. 인턴 일상들
- 새로운 인턴 친구들의 인터뷰, 영국의 아주 섬세한 화재경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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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이지만 어느새 한국보다는 안 추워진 영국의 날씨.


약간 서늘한 듯 으슬으슬한 날씨가 계속된다. 아마 내 기억이 맞는다면 겨울이 요고보다 아주 좀 더 추워진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영국의 겨울은 영하까지도 조금씩 떨어지고는 하니 두꺼운 옷이 필요한 건 분명하다. 내 택배가 어서 와야 할 텐데.


오늘은 새로운 인턴 친구들이 면접을 보러 왔다. 인턴은 사실 대학생 친구들이 영국은 많이 하는 편이라서, 다들 앳된 얼굴들이었는데 다들 학기 중인데도 열심히 하는구나 싶었다. 예전에 학교 다닐 때는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어서 깨닫지 못하였는데, 혹시 누군가가 대학원을 들어가고자 한다면 모든 일들을 꽤나 한 발 일찍 준비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냥 간략하게 적어보는,

내가 대학원을 다닐 때는 못하였지만 혹시 가고 싶은, 혹은 이미 공부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두었으면 하는 '대학원 입학 전 알고 가자! 목록'









1. 대학원 과정 1년, 혹은 2년은 아주 짧으니까 의외로 영국을 즐길 시간이 아주 많지 않다.


2. 9월 학기 시작 전에 이력서, 자소서, 포트폴리오는 준비를 해놓고 오자. 어설프게나마 어디라도 쓸 수 있도록.


3. 입학과 동시에 구직을 시작해야 한다. 보통학교마다 입학한 후 바로인 9-10월에 직업 관련 페어를 여니 참여해 보자. 꼭 인턴이라도 이력서를 돌리기 시작해야 취직하기 용의하다.


4. 바쁘고 힘들고 수업은 영어도 잘 안 들리고, 물가는 비싸서 장금이가 되어야 하는데, 재료값이 만만치가 않다. 게다가 수입원이 없으니 쪼들일 각오를 해야 한다


5. 그 와중에 패션디자인과 과제는 너무 많으니, 직접 만들기보다는 디자인하고 패턴 뜬 후로는 제작 업체에 서둘러 맡기고 과제하고 취준하는게 훨씬 더 현명하다.


6. 1년 대학원 과정은 사실 대학생이 하는 3년 과정의 농축액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7. 그래도 아무리 바빠도 동아리 하나는 들고, 친구도 소중하게 사귀는 걸 잊지 말자. 그것들이 아주 좋은 추억이 되니까.







서양인은 동양인을 너무 어리게 보고, 동양인은 서양인을 너무 나이 들게 보는 경향이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우리 사장님이 나는 족히 40대 중반은 넘으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30대 중후반일 수도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 미묘한 놀라움!


이러나저러나 인턴 일은 나름 재밌다.


가만히 앉아서 과감한 디자인의 무대의상 같은 것들의 디자인을 보여주고, 컨펌받고, 패턴을 뜨고 있다 보면 아 나는 내 일이 정말 좋고 즐겁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피어난다. 힘든 건 힘든 일이지만, 그냥 내가 이걸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다. 뭔가를 배울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일인지.


그 와중에 밑에 집이 공사해서 공사 분진이 날렸는데, 그걸 화재로 착각한 아주 예민한 화재경보기 씨가 울려지는 바람에 사장님과 나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1층으로 대피했다. 단둘이서, 그리고 다른 거주하는 분들과 서 있는데 웃기고 은근히 추웠다. 한국보다 따뜻한데 은근히 쌀쌀하고 척척한 영국. 흐려서 그런가.







3. 집에 혼자 있으면 밀려오는 답답함과 과식의 해결책
= 산책






내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과식하게 된다는 습관이 있다는 것은 사실 19년도 대학원 생활 중에 알게 되었다.


나는 굉장히 루틴적인 사람인데, 매일 거의 동일한 시간에 밥을 먹으려고 노력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때의 경험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스트레스는 굉장히 많이 받으면서도 어디다 풀 줄을 몰랐고, 나는 아침에 아침 점심 저녁을 한 번에 다 먹어버리고는 쫄쫄 그다음 날 아침까지 굶어버리고는 했다. 식욕을 통제하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웠던 그 시절. 그때는 몰랐다. 몸과 마음을 잘 쉬게 하고, 잘 다스리게 하는 것이 식욕도 스트레스도 다 연관이 되어있다는 것을.


그때의 경험을 흘려보내면서 오히려 해외에서 생활한다는 건 좀 더 정신을 똑띠 차리고 살도록 끝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지도 모르는다는 생각을 슬그머니 했다. 그렇게 내 몸보다도 학교생활을 어떻게든 적응하는 것에 온 정신이 팔려있던 나는, 병아리였고, 아직도 미숙했고, 잘 알아듣지 못했고, 늘 새로운 도전 앞에서 실수 투성이곤 하였으나 그래도 쉽게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건 지금도 그러한 것 같다) 그러다가 엉뚱한 코로나라는 시대의 적군을 만나 한국에 돌아왔고, 몸이 너무 안 좋아서 갔던 병원에서 종합병원 같은 진단명을 받게 된다. 아, 몸을 잘 챙겨야 했구나.


암튼, 그래도 이번에는 내 어떻게든 건강을 지켜보겠다고 영양제도 3개나 사고, 비타민 디도 꼬박꼬박 먹고 있으며, 웬만해서는 12시 전에 자도록 노력하고 있는 요즘!


그래도 다시 슬금슬금 스트레스가 높아지면 과식의 기운이 올라와서 조심하는 중이었는데, 오늘도 별반 다르지 않게 이것저것 과식을 하고 있다가 마지막 저녁, 가만히 수저를 멈추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진짜 지금 필요한 게 뭔지.


우선은 오늘 먹은 건 행복하게 마무리했다. 음식은 죄가 없다. 나는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인간은 누구나 과식할 수 있고, 나 역시 그런 날 이 있을 수 있다. 오히려 지금 더 중요한 건 과식했다는 자책에 내 하루를 망치는 것이 아니라, 내 남은 하루를 잘 소중하게 살아내는 것.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필요한 게 뭘까?


= 나는 답답했던 거야. 짧게라도 나갔다 오자. 필요한 거 있잖아.


그리고 후다닥 가볍게 외투를 걸치고 운동복+잠옷 바람으로 집 앞 슈퍼에 갔다. 똑떨어진 두유를 사러. 더 싼 거 중에 고민하다가, 그래도 그냥 먹고 싶은 거 먹자 하고 좋아하는 두유와 욕망의 제로콜라를 들고 돌아가는데, 갑자기 만난 슈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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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체한 것 같은 알 수 없는 마음이 답답함이었다는걸, 나는 저 달을 보고서야 알았다.



아, 잘 걸었구나. 또 나에 대해 배웠구나.



그냥 어쩌면 인생은 나 자신을 잘 알아기 위한 여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어디까지를 견딜 수 있는지, 스스로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스스로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나는 어떤 공간을 좋아하고 어떤 일을 할 때 행복을 느끼는지.


의외로 꼼꼼하게 질문을 적어보면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는 것을 깨달을 지도 모른다. 내 한계를 만났더라도 두려울 필요가 없다. 조금씩 도전하다 보면 그 임계점이 더 넓어지는 순간이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니까. 그냥 내 마음이 편한 곳과 정도가 오늘의 가장 적절한 순간이 아닐까. 설사 오늘 다 하지 못해도 괜찮아, 우리한테는 내일도 있으니까. 이만큼 해낸 것도 정말 대단한 일이다. 힘이 들지언정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그릇을 넓혀가는 기분이 드는 요즘.


성장이 즐겁기만 하다면 그건 성장한 게 아닐 수도 있다. 좋아하는 일은 절대로 늘 즐거울 수 없어, 욕심이 끼어들기 때문에. 그게 무슨 일이든 반드시 고통을 수반함을 인정하자 - 그래서 늘 내가 데미안을 좋아했듯이.



오늘 하루도 열심히 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우리 모두 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늘도 모두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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