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마 Apr 25. 2023

내 나이 곧 서른, 영국유학 준비를 다시 시작하며

한국의 패션 디자이너에서 다시 영국 학생으로. 그런데 나 진짜 괜찮은가?

'내가 이 나라를 다시 온다면, 다시는 이방인은 되지 않을 거야.'


 히드로 공항으로 가는 내셔널익스프레스 버스 안에서 나는 생각했다.

 7개월.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긴 그런 시간이었다. 평생을 한국에서 살아온 내가 다른 나라는 콘센트 모양조차도 다를 수 있다는 커다란 충격을 느끼게 한 나라. 한창 공사 중이었던 빅벤이 영국의 한강인 템스강 너머로 보였다. 완공이 되는 건 볼 줄 알았는데. 무미건조한 사람들 너머로 수많은 랜드마크들이 지나갔다. 풍경이 흘러간다. 나는 지금 다시, 내 나라인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것도 무슨 야반도주하듯이.


 코로나가 영국을 크게 강타한 것은 20년도 2월에 일이었다. 이제 막 완벽한 문장과 발음으로 COSTA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구매할 수 있게 된 나는 나름의 자신감이 붙은 상태였다. 20년도인 그때는 얻는 것보다 놓치는 게 더 많은 것 같은 1년 과정의 대학원 수업이 한창때였다. 주문하나 못했고, 원단가게가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몰라 더듬더듬 찾아가며 어리벙벙한 대학원생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1년은 영국의 정규 석사 과정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냥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거다. 갓 태어난 병아리 마냥.


 그래도 20년 2월이면 병아리보다는 조금 나은 상태였다. 노랑이에서 빨간 털이 조금씩 나던 시기. (독자분들은 병아리가 닭이 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정말로 그건 동심파괴였다. 아무튼 그건 나중에 말하던가 하고) 이제야 조금 이 나라에 대해 대충 파악이 끝났고, 물론 당연히 아쉬운 게 아쉽지 않은 것보다 훨씬 많았지만 그래도 작업하다가 코피를 흘릴 만큼 그 당시에 나로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이젠 조금씩 이 생활도 익숙해지고 과제의 대한 압박감도 익숙해질 무렵, 아니 이게 웬걸 전 세계적 위기인 코로나가 터져버린 것이다.


 당시에 영국은 몇십만 명이 죽을 만큼 상황이 심각했다. 뉴스에 1명이 떠서 속보가 났을 때를 기억한다. 그 숫자는 순식간에 몇 백 명, 몇 천명이 되었고 노인 인구가 많은 영국은 수많은 사람들이 유명을 달리했다. 영국의 보건 기관인 NHS에서도 감당이 안 될 만큼의 확진자 숫자가 쏟아졌고 결국 런던을 봉쇄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소문마저 돌았다. 내가 다니는 영국 남부의 학교 역시도 긴급한 메일을 보냈다. 이번학기에 모든 대면 수업을 취소한다는. 모든 캠퍼스가 문을 닫을 거니까 국제 학생들은 돌아갈 거면 돌아가버리라는 그런 무책임한 메일을 남기고.


 그때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단 두 개였다. 하나는 어떻게든 영국에 남아 남은 학기를 마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본국으로 돌아가 화상 수업으로 남은 과정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영국에 남아 남은 과정을 어떻게든 마쳐 보고 싶었지만 원단 가게마저 문을 닫은 상황에서 작업을 이어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동양인에 대한 혐오와 위협, 차별 어린 시선들, 겁에 질린 사람들의 사재기로 동이나 버린 마트의 물건들, 이런 것들은 내가 영국에 남아 있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의료 시스템도 마비가 되고 백신도 없던 상황. 이 바다 건너 낯선 나라에서 코로나에 걸려도 나를 챙겨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터였다. 결국 사랑하는 가족들은 내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랐고, 나는 그것을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 나라를 다시 온다면, 다시는 이방인은 되지 않을 거야.'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생각했다. 1년을 위해 싸두었던 짐은 두 손에 차고 넘칠 정도여서 히드로 공항에서 한국의 비어 있는 할머니집으로 귀양살이를 하러 가는 길마저도 쉽지 않아 보였다. 층 높은 버스의 계단을 내려가고 짐을 챙겨 평소와 다르게 소름 끼칠 만큼 아무도 없던 공항 안 수속을 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히드로공항, 내리면 처음으로 보이는 카페 네로에서 돌아갈 때 커피 한 잔을 더 하고 싶었는데. 내가 생각한 한국으로 오르는 귀국길은 이게 아니었는데.


 아쉬움의 눈물이고 뭐고, 혼이 쏙 나갈 만큼 이 모든 변화들에 정신이 없던 나는 울지도 못했다. (물론 운건 좀 나중의 일이다) 그저 나는 되뇌었다.


나 다시, 돌아가리라.

언젠가는 꼭

또다시


영국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