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도피의 결심, 낯선 땅 피지

비로소 나를 마주한 뜨거운 섬

by jayjay

공시생의 시간이 내게 남긴 것이 단지 실패만이 다였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 시간은 오히려 나에게 인내와 자기 성찰,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떤 길이 나에게 어울릴 수 있는가?”를 되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견디는 법을 배웠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법도 알게 되었다. 이런 시간들이 있었기에 나는 조금 더 나를 이해하게 되었고, 지금 이 순간 새로운 도전 앞에서 주저하지 않게 만들어 주었다. 앞으로 어떤 새로운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니면 또 다른 시련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순간의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의 시작점에 서 있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출발을 위한 고민 끝에 내가 선택한 곳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장소,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피지였다. 필리핀, 캐나다, 호주 등 —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어학연수지 대신 나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택했다. 한국인이 드물고, 인터넷 정보도 부족하며, 낯선 언어와 문화로 가득 찬 그 나라가 오히려 내게는 더 자유롭게 느껴졌다. 비용이 저렴하다는 이점도 있었지만 특히, 내가 아는 어떤 누구도 없는 곳. 같은 문화의 사람들 속에 섞여 살아가는 것이 아닌, 미지의 세계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오롯이 가질 수 있는 곳. 그 조용하고 느긋한 공기 속에서 나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사라지고 싶다”는 마음속 깊은 바람을 실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빠르게 현실을 정리해 가는 준비과정은 공시생으로서 책상에만 앉아 있던 시간과는 전혀 다른 삶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오히려 그 과정이 내 마음을 맑게 정화시켜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평생 어떤 새로운 도전도 하지 못할 것만 같은 그 절박한 마음 하나로 비행 티켓을 들고, 낯선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게 되었다.

공항 로비에서 전통 복장을 입고 맞이해 주 모습

2010년 8월. 드디어 피지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나를 맞이한 건 뜨겁지만 부드러운 공기, 낯선 향기, 그리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느긋한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새로운 세상은 마치 슬로 모션처럼 느리게, 아주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그 조용한 리듬은 많이 어색했고 내 안의 초조함과 불안을 불식시키기에는 빠르게 흘러갔던 시간만 큼이 더 필요로 할 것 같았다. 마음을 다 잡기 위해 깊게 숨을 들이켜자 순간 낯설고 이국적인 뜨거운 공기가 휘몰아쳐 들어와 새로운 시작을 맞이했음을 실감하게 해 주었다. 그렇게 피지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나 만큼의 공간을 내어 주었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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