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작은 성취감, 여러 길을 만나다.

가능성을 되찾은 순간

by jayjay

피지에서의 첫날, 나는 여전히 스스로를 ‘실패로부터 떠나온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도망치듯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그 끝에 도달한 낯선 섬은 내게 기대도, 환영의 인사도 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곳은 조용히, 묵묵히 내가 다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기다려주고 있었다.

어학원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곳이었고, 연수생들 역시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한국인은 나를 포함해 단 세 명.

한국어로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거의 없다는 사실은 처음엔 막막함이었고, 곧 도전이 되었다. 그 고립감은 신기하게도 몰입으로 바뀌었다. 오롯한 나만의 공간, 나만의 시간. 나는 그 낯선 땅에서 처음으로 ‘홀로서기’라는 삶의 방식을 체득해 나가기 시작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았고, 문화는 낯설기만 했고, 사소한 오해에도 쉽게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그 모든 불편함들이 스스로와 마주하는 시간이 되어 주었다. 나는 시험을 위한 영어가 아닌, 생존을 위한 도구로 익혀 나갔다. 영어에 대한 울렁증으로 수업시간에서 조차도 입도 뻥끗하지 못했고 나머지 시간의 대부분도 숙소에 머물면서 영어와 씨름했다. 일상적인 생활에서의 식사 시간도, 산책도, 소소한 대화도 모두 생존의 연장선처럼 느껴졌다. 처음에는 한 문장을 입 밖에 내기 위해 수십 번 머릿속에서 조립하고, 해체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문장을 제대로 말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말에 상대방으로부터 답변이 돌아왔을 때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저 어렴풋이 내 말이 틀렸는지 맞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상대방에게 전달되었다 안도감. 그때 느낀 작은 성취감은 아주 작은 것이었지만, 놀랍도록 강렬하게 나의 뇌리에 남았다. 그 감정은 내 안에 오래 잠들어 있던 생기에 작은 불씨가 되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피지 현지 슈퍼마켓

다만 언어만이 아니었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관점도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루저’, ‘실패한 인생’이라 여기던 스스로의 시선이 조금은 부드러워지고,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생존을 위한 몸짓이 “살아가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마음속에 조용히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만난 몇몇 일본인 친구들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들은 조용했고, 사려 깊었고, 자신의 이야기를 서두르지 않고 들려주었다. 나 역시 어색함을 뒤로하고 조금씩 마음을 열어 갔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다른 상처와 이유를 지닌 사람들이었지만, 우리는 같은 전환점 위에 서 있다는 공감으로 더욱더 가까워졌다. 그들과의 교류는 내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었다.

누군가는 일로부터 도망쳐 휴식을 위해, 누군가는 사람 사이에서 길을 잃어 방황의 끝으로, 누군가는 삶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 지금, 여기 이곳에서 인연이 되었다. 나는 그들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인생에서 실패란 없으며 다양한 길이 존재할 뿐이구나.”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된 순간, 나를 무너뜨리던 기억이 조금씩 희미해졌고, 언젠가는 다시 스스로의 목소리로 자 인생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전 10화9. 도피의 결심, 낯선 땅 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