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
피지에서의 삶은 단순했다. 화려하지 않았고,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 단순함이 내게는 처음으로 “살아간다”는 감각을 되돌려준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낯선 고요함이 어색하고, 가끔은 외로움이 벽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그 고요함은 내면의 소음을 잠재우는 공간이 되어주었다. 아침이면 어학원으로 향하고, 낮에는 영어에 집중하며 하루를 보내고, 저녁이면 간단한 식사를 하고, 이따금 친구들과 대화를 나눈 뒤 밤이면 조용히 잠드는 일상. 그 어떤 이정표도, 타인의 기준도, 기대도 없는 삶. 그곳에서 나는 나만을 위한 삶을 비로소 바라볼 수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의 나는 항상 비교 속에서 존재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누군가의 진로, 누군가의 시선에 나 자신을 끼워 맞추려 억지 노력을 했다. 하지만 피지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아무도 내 과거를 묻지 않았다. 나는 “공시생”도, “루저”도 아니었다. 그저 지금 여기 있는 나로 존재했다. 그 자유가 내 안의 억압을 녹이고, 오랫동안 내 안에 쌓여 있던 죄책감과 후회를 천천히 흘려보내주기 시작했다.
물론, 모든 날이 평온한 것은 아니었다. 밤마다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르기도 했고, 모국의 음식, 언어, 풍경이 불쑥불쑥 마음 한가운데를 찔렀다. 생활비 걱정에 불안에 떨던 날도 있었고, 문화의 차이에 당황하고 주눅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감정들조차 이제는 내 삶의 일부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힘 없이 이리저리 끌려만 다니던 무기력한 시절의 나는 감히 상상도 못 했던 삶. 나는 이제 도망치는 이가 아니라, ‘선택하고 나아가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피지에서의 시간은 어느덧 3개월이라는 마침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무작정 떠나왔던 이 길의 끝에서 나는 다시 물어야만 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새로움을 향한 전진을 멈추고 루저의 생활로 돌아가는 선택을 해야 하나? 잠시의 평온에 머무르기보다는 지금 이 새로운 감정을 더 넓은 세계로 확장해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피지와 이웃한 호주행의 결심에 이르렀다. 더 넓은 땅, 더 다양한 사람들, 그리고 더 많은 도전이 기다리는 곳. 생존을 위한 언어의 깊이를, 생각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었던 삶의 구체적인 감각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느껴보고 싶었다.
떠나기 며칠 전부터, 피지의 바람은 유난히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태풍이 지나가며 많은 비와 바람을 몰고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출국날까지 비행기의 결항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새로운 도전의 시작에 대한 나의 불안은 기우에 불과했음을 알게 되었다. 출국 날 하늘은 유달리 맑았고, 햇살은 부드럽게 내 어깨를 감쌌다. 나는 그 풍경을 마음속 깊이 새기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이곳은 패배주의에 빠져 허둥지둥 도망쳐왔던 나를 서서히 회복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더 이상 실패한 사람이 아닌 스스로의 길을 찾고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음을 부드러운 햇살아래서 만끽했다. 때론 앞으로 멈추고 돌아갈지라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지금 이 한 걸음과 함께 삶을 개척해 가는 사람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