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으로 배우는 삶의 본질
피지에서의 세 달은 회복의 시간이었고, 그 회복은 멈춤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였다. 이제는 나를 세상 속에 드러내고, 다시 살아 있는 존재로서 경험하고 싶었다. 그 선택의 땅이 바로, 호주였다. 워킹홀리데이라는 제도 아래 세계 곳곳에서 젊은이들이 모이는 이곳은 더 이상 도피가 아닌 삶의 실전 무대였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사람들 속에서 나는 ‘외면’이 아닌 ‘관계’ 속의 나를 찾고자 했다.
호주에 발을 디딘 순간, 내 수중엔 피지에서 남은 동전 몇 개와 겨우 백만 원 남짓한 한국 돈이 전부였다. 매일 지불하는 숙박비를 생각하면 조급함이 앞설 법도 했지만,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 설렘이 더 컸다. 이번엔 도망이 아니었다. 비로소 나아가기 위한 스스로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브리즈번 외곽의 여행자들을 위한 작은 백팩커스(Backpackers). 낯선 국적의 청년들과 한 공간을 나누며 나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인생의 주체로서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아침마다 호스텔 벽에 붙은 구인 공고를 살폈고, 시내를 돌며 구인처를 찾았다. 낯설고 어설펐지만, 그 절박함이 하루를 버티는 힘이 되었다.
그러던 중, 한인 커뮤니티를 통해 좀 더 저렴한 한국인의 셰어하우스를 찾게 되었고, 그곳에서 나는 첫 번째 일거리를 잡았다. 몇 시간짜리 짧은 아르바이트. 한국 기업 정보를 모아 자료로 만드는 일이었다. 단 몇만 원의 보수. 크지 않은 돈이었지만, 내 손으로 처음 벌어들인 호주의 돈은 생각 이상으로 묵직했다. 시급 몇 천 원의 나라에서 긴 시간 무급에 가까운 공시생활을 견뎌온 나에게 그 돈은 나라는 존재를 인정받는 첫 신호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여전히 생활은 불안정했고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영어는 여전히 서툴렀고, 몸과 마음을 쉬게 해 줄 일터를 찾기란 낯선 땅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불안한 시간들이 쌓여갈 때 셰어하우스의 주인으로부터 12시간이나 떨어진 시골 마을의 지인이 일자리를 소개해 줄 수 있다는 이야기에 깊은 생각 없이 수락의 표현을 했다.
이것저것 가릴 상황이 아니었던 나는 그 호의를 따라 호주 구석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떠났다.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작은 시골 마을. 이동거리만 꼬박 하루가 걸렸다. 힘들게 도착한 나는 이제 막 호주에 들어온 새내기 관광객이기도 했기에 관광이라는 사치아래 바다의 아름다움을 한동안 넋 놓고 바라보았다. 설렘도 잠시 그러다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일은 아직 없었고, 셰어하우스의 주인으로부터 소개받았던 지인의 답변은 ‘조금만 기다려 달라’였다. 조금씩 의심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통장잔고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해 조바심이 극도에 다다랐을 무렵, 숙소 주인의 소개를 통해 토마토 농장의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하루 일과의 시작은 새벽 6시에 시작되어 도시락을 준비해 도착한 곳은 드넓은 들판에 수천 개의 초록 덩굴 위 붉게 익기 시작한 토마토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끝이 닿는 대로 토마토를 따고, 몸을 구부렸다 펴기를 반복하며 하루를 온전히 노동에 바쳤다. 점심도, 쉬는 시간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모든 게 자율이었고 몸은 금세 지쳤으며 손은 거칠어졌다. 그러나 놀랍게도, 나는 웃고 있었다. 고된 하루가 하루가 쌓여 주어진 내 손 안의 페이서머리 주급표. 그 작은 종이는 이전의 어느 시험 성적표보다 훨씬 더 따뜻했고, 훨씬 더 의미 있는 보상이 되어주었다. 노동은 나를 다시 살아 있게 해 주었다. 내가 쓸모 있는 존재라는 감각. 누군가에게 필요한 손, 노력한 만큼 돌아오는 대가.
그것은 공시생 시절, 끊임없이 평가당하던 삶에서는 결코 느껴보지 못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주었다. 나는 마침내 누군가의 기대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삶 속에서 스스로를 증명하는 듯했고, 고단했지만, 자유로웠다. 작고 단순했지만, 분명한 하루였다. 그 하루하루가,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