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밀리듯 지나간 시간
1982년, 한 시골 마을.
삼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나는, 그 시대의 공기와 질서 속에서 조용히 세상에 발을 디뎠다. 유교적 권위와 남아선호 사상이 짙게 스며든 사회. 나는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른들의 기대와 전통의 무게를 안고 자라야 했다. 아버지는 말없이 강했고, 어머니는 말없이 견디셨다.
나는 그 틈에서 조용히 자라났다.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특별한 시선을 받지도 못했다. 누군가의 기억에도, 나 자신의 기억에도 흐릿한 유년. 그 시절의 나는 누구에게도, 심지어 나 자신에게조차 뚜렷한 존재가 아니었다.
학교는 집 앞 골목길을 몇 걸음만 걸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었다. 교실 창밖의 플라타너스는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었고, 나는 그 변화마저 무심히 바라보았다. 방과 후엔 친구들과 좁은 골목길에 모여 놀았고, 가끔은 개울가에서 물고기를 잡기도 했다. 해가 지면, 어머니의 된장국 냄새가 퍼지는 부엌이 나를 기다렸다. 그 시절은 따뜻했고 평화로웠지만, 내 안에는 아무런 ‘꿈’도 ‘목표’도 없었다.
‘장래 희망’이라는 글씨 아래, 나는 늘 ‘과학자’라는 단어를 적어 넣었다. 그럴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과학자가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나는 그저, 어딘가에 도달하길 바라는 마음만으로 그 단어를 적었을 뿐이었다. 남들이 학교에 가니 나도 가고, 남들이 학원에 다니니 나도 다녔다.
스스로 선택한 길은 하나도 없었고, 바람 부는 대로, 물 흐르는 대로 삶에 몸을 맡겼다. 그게 사는 거라 믿었다. 특별하지 않은 나날 속에 불안은 자리 잡을 틈조차 없었다.
그러다, 중학생이 되며 세상이 조금씩 넓어졌다. 나보다 더 똑똑한 아이들, 더 잘 사는 친구들을 마주하게 되었고, 그들과 나 사이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투명한 벽이 놓여 있었다. 나는 작아졌고, 내 안의 목소리는 점점 더 희미해졌다.
고등학생이 되어 입시에 휘말렸을 때도, 나는 여전히 방향을 잃은 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목표는 없었고, 그저 주어진 문제를 풀고 시험을 치렀다. 모두가 그리하니 나도 그렇게 해야만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와 되돌아보면, 그 시절의 나는 ‘살아가는 법’이 아니라, ‘살아내는 법’을 배우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조차 던지지 못했던 소년.
그 조용한 공허함이, 훗날 내 삶에 거대한 파도로 밀려올 줄은…
그때는 정말,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