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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희 Jun 26. 2023

그 시절에 뭐 들으셨어요?

그리고 그때 뭐 하셨어요?

누구나 멱살 잡고 어느 한순간으로 끌고 가는 노래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아마 어디 논문하나 뒤져보면, 음악과 기억의 상관관계에 대해 나열한 게 한두 개쯤 있을 거다. 


자타공인 잡식취향인 나는 꽂히는 음악이 생기면 주구장창 한곡반복하던 역사가 많은데, 이상하게 타인에 의해 많이 듣게 된 노래가 더 상황이나 그런 기억은 잘 남는 것 같다. 그러니까, 그냥 내 이어폰에 내가 골라 재생한 게 아니라 누가 틀어주거나 우연히 들린 노래들 말이다. 


나의 경우에는 대표적으로 크러쉬 CRUSH - 잊어버리지 마(feat 태연)가 그렇다. 매일 밤에는 술을 얼큰하게 마시고 새벽같이 카페에서 매장을 열면서 일하고를 반복하던 시절에 음악도 겸업하시던 점장님이 하필이면 이 노래를 플레이리스트 제일 첫 곡으로 지정해 놨기 때문이다. 혹여 우리가 바꾸기라도 하면 이 노래를 절대 '잊어버리지 말'라며 다시 첫곡으로 올려뒀다. 이유는 아직도 모른다. 스밍이 필요했던 걸까. 덕분에 나는 가을부터 눈이 오는 겨울까지 그 많은 아침에 숙취와 함께 이 노래를 들었다. 숙취에는 내가 내린 아이스바닐라라떼가 와따라며 중얼거리며 이겨냈던 시간들. 그래서 이 노래를 들으면 난 냅다 그 카페 창가로 가버린다. 술은 마시지도 않았는데 숙취가 슬쩍 옆구리를 찌르는 것 같기도 하고. 



며칠 전에 문득, 청소년 시절에 듣던 노래들을 떠올려봤는데 한두 개 밖에 기억나지 않는 거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생각은 안 나고, 네이버 N드라이브를 볼 용기는 나지 않고. 고민하다가 고등학생 때 나와 취향을 나눴던 친구 중 한 명에게 연락을 했다. 안 본 지도 오래됐고 SNS로 가끔 안부나 주고받는, 심지어 바다 건너 있는 친구에게 대뜸-


너.. 내가 무슨 노래 들었었는지 기억나니..?


나라면 어이가 없어 차단했을 테지만 친구는 고맙고 다행히도 내 취향을 기억해 주었다. 나를 생각하면 생각나는 노래가 몇 개 있다며 가수 몇몇을 언급했고 그때부터 갑자기 혼자 2000년대 여행을 떠나기 시작한 거다.



나는 주변에 괜찮은 음악 취향을 가진 친구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때는 모든 청소년들이 mp3나 pmp에 영어 듣기나 인터넷 강의 대신에 노래랑 인터넷 소설을 잔뜩 넣고 다니던 때. 불법다운로드는 일상이고 좋아하는 친구에게도 메일로 노래파일을 전송하던 때였기 때문에(나의 윗세대만큼 감성은 없다. CD에 구워준다거나 라디오 녹음을 한다거나... 그런 정성은 없고 그냥 냅다 메일로 내용을 대충 후려갈긴 성의 없는 교류였다. 우린 하여튼 그냥 대체로 감성은 없는 무법세대였던 것 같다.) 친구들은 종종 내가 좋아할 것 같은 장르의 노래들을 보내줬다. 근데 그 장르들의 범위가 너무 넓어서 난 에미넴, MC스나이퍼부터 브아걸, 이소라, 브로콜리 너마저, 니요, 콜드플레이, 오아시스, 핑크까지 그냥 주구장창 들었다. 클래식도 재즈도 JPOP도 들었던 것 같다. 내 친구들의 취향 중에 귀에 걸리지 않는 건 다 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뭔가 떠올려도 기억이 안 날 만도 하다. 나무 몇 그루라면 그게 무슨 나무였는지 생각날 텐데 나는 크기가 뒷동산쯤이었으니. 



그러다 문득 알고리즘은 나의 취향을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기억나는 몇 곡을 유튜브 플레이리스트에 담아봤다. 그랬더니 자동으로 그 시절의 비슷한 장르 노래들을 추천해 주는 게 아닌가? 나는 보는 족족 반가운 노래들을 플레이리스트에 담았고 그때 그랬던 것처럼 KPOPPOP으로 플레이리스트를 나눴다. 별 이유는 없다. 그냥 한국노래랑 외국노래를 나누고 싶었나 보다. 와중에 JPOP은 JPOP으로 따로 뒀던 기억이 나서 POP 플리에 담지 않았다. 플레이리스트는 순식간에 50곡, 200곡이 넘게 담겼다. 아마 10대 청소년 시절 내내 듣던 노래들을 기준 삼아서 꽤 양이 많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노래들을 듣기를 지금 이틀째. 나는 지금도 또래보다 최신 음악을 잘 찾아 듣고 선호하는 편이긴 하지만, 누구나 마음속에 올타임레전드는 있는 법. 도통 이 플레이리스트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오늘은 비도 오고, 버스에서 몇 정거장 앞서 내려 굳이 동네를 좀 걸었다.(나는 허리 통증에 산책이 좋다고 믿고 있다.) 나는 초, 중, 고를 이 동네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느 길을 걸어도 익숙한데 오늘은 그 길을 혼자 걷는 기분이 아니었다. 


이어폰 속에 흘러나오는 노래들이 그 시절 친구들과 함께 걷고 있는 기분이 들게 했다. 


내 옆에서 수다를 떨면서 동네를 몇 바퀴쯤은 돌던,

내 얼굴로는 밤길이 절대 위험할 리가 없다면서도 멀리서부터 우리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굳이 밤을 걸었던,

벤치에서 세상이 무너져라 연애상담을 하던,

새로 나온 아이돌에게 빠져서 왜 그를 주목해야 하는지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조용한 도서관에서 주구장창 외힙을 들으면서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고민했던,

공부하라고 보내놓은 도서관에서 슬쩍 나와 노래방으로 숱하게 방향을 틀었던,


음악은 정말 신기하다. 

분명 주변엔 나보다 10살도 넘게 어린 친구들이 학원이 끝나고 수다를 떨며 집에 가고 있는데, 나의 10년 전 모습이 스며들면서 자연스레 동화되었다. 

물론 현실은 퇴근 후에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도수치료받고 온 직장인이지만,

미워서, 바빠서, 크면서 맞지 않아서 멀어진, 그래서 지금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그 시시콜콜한 아이들이 내 옆을, 같이 걸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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