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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형 May 16. 2016

[영화] 그을린 사랑

비논리적인 명제가 성립하는 위대한 사랑의 'herstory'


비논리적인 명제가 

성립하는 위대한 

'herstory'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기록된 사건이라는 말이 있듯이 같은 현상이나 사건을 보더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떠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평가받는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역사는 남성중심의 'history'로 알려져 있고 현재까지 우리가 접하는 미디어 역시 남성중심의 시각에서 사회를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역사는 이념과 신념, 그리고 이익을 놓고 다투는 전쟁이나 투쟁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는 전쟁과 함께 하고 인간의 드라마는 전쟁 속에서 극적으로 부각된다. 라디오헤드 음악과 함께 강렬한 영상으로 시작하는 영화 <그을린 사랑>은 극도로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이슬람 사회에서의 대립과 폭력 속에서 '노래하는 여인' 나왈 마르완의 인생을 통한 'herstory'로 관객조차 감당하기 힘든 비극을 풀어내고 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레바논의 끊이지 않는 내전은 종교 간의 갈등에서 시작했다. 험난하여 추적하기 어려운 산악지형의 레바논은 역사 내내 다양한 종교와 집단 그리고 정치적 반체제 인물들을 위한 피난처 역할을 해왔다. 1943년 독립한 레바논은 다양한 기독교와 이슬람의 여러 계파들의 기반 위에 세워졌다. 친 서방정책을 추구하는 기독교 세력과 아랍민족주의를 주창하는 급진적인 이슬람 간의 불화는 곧 내전으로 치달았다. 결국 미국의 개입으로 내전은 끝났지만 두 종파 사이의 정치적인 혼란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1972년 요르단에서 레바논으로 옮겨온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다시 내전을 격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레바논 남부에 정착한 대규모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세력을 키워 정부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나라 속의 나라'로 이스라엘 공격을 해왔다. 이들 팔레스타인 난민촌이 바로 헤즈볼라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전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들 헤즈볼라와 팔레스타인 난민들 간의 분쟁이다. 그 이후로도 레바논은 종교분쟁과 정치적 대립으로 인한 내전이 오늘날까지  끊이지 않고 반복되었다. 최근에 세계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환영을 받은 아랍민주화운동 열풍 속에서 레바논은 이집트와 함께 중심이 되면서 종교, 역사적으로 급변적이고 특수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국가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 영화가 레바논의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제작은 레바논과 전혀 관련이 없는 캐나다 퀘벡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몇몇 영화들은 역사적 사실을 이데올로기나 상업적 목적에 맞추어 해석하고 왜곡하기도 한다. 그리고 한 레바논 네티즌은 imdb.com에 어설프고 억지스러운 재현이라며 이 영화를 비판했지만, 역사의 당사자가 아닌 전혀 동떨어진 곳에서 특수한 역사를 그려냈음에도 불구하고 드니 빌뵈브 감독의 시선은 타자의 역사적 사건을 진지하고 진중하게 바라보았으며 선악에 대해서 구분 짓거나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서 그려내고 있다. 

 위와 같은 전쟁을 배경으로 한 <그을린 사랑>은 '둘'이라는 상징을 영화 곳곳에 배치하고 있다. 영화 속 배경이 되는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의 접경지역은 두 가지 이념과 세력이 극도로 대립하고 있다. 또한 어머니의 흔적을 추적하는 아들과 딸, 이란성 쌍둥이가 등장하고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은 불어와 영어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하는 퀘벡이다.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죽고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마르완의 첫째 아들은 쌍둥이의 오빠이자 아버지라는 두 가지 모순된 위치를 가지고 있다. 넘쳐나는 둘에 대해서 영화는 '일 더하기 일은 일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고 있는데, 영화에서 인물들을 통해 수학을 계속해서 이야기하면서 일 더하기 일이 일이 되는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지만, 공증인들이 신성하게 생각하는 약속과 어머니의 초월적이고 모성애적인 사랑이라는 비합리적인 감정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는 주된 주제로 폭력과 사랑을 다루면서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일어나는 남성중심의 전쟁을 나왈 마르완이란 여성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또한 쌍둥이남매 중 딸인 잔느는 어머니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반면 아들 시몽은 소극적이고 현실도피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전통적인 남녀의 성역할을 뒤집는 설정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주인공 나왈 마르완은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할 뻔하고 포로수용소에서 강간당하는 남성 중심적이고 마초적인 사회가 저지르는 폭력의 희생자이면서 사회의 제약 속에서 자신만의 신념을 지키고 실행하는 진취적인 여성이자 폭력을 당하고도 노래를 부르고 충격적인 진실 앞에서도 사랑과 박애로 극복하고자 하는 다양한 여성상을 보여준다.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사라지더라도 흔적을 남긴다. 나왈 마르완의 딸 잔느 마르완이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나서는 과정은 엉켜있는 실타래처럼 풀어나가기 복잡하다. 또한 거기에 얽혀있는 관계들은 복잡한 문제로 출발해서 또 다른 문제들을 불러온다. 하지만 문제를 인식하고도 풀어나가기 어렵다고해서 내버려 둔다면 영혼은 평온하지 못한다. 이 영화는 흔적을 추적 해가는 일, 다시 말해 역사를 찾아가고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역사가 반복하는 전쟁과 폭력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진실을 알아가는 방법은 어떤 역사의 시작점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 즉 결과에 대한 그 원인과 본질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왜곡과 함께 또 다른 악순환이 반복된다. 나왈 마르완이 자신이 겪은 비극의 출발점을 포로수용소에서 당한 강간으로 인식했다면 증오와 함께 비극이 연장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첫 번째 아들이 태어나는 그 순간의 사랑과 약속으로 시작된 비극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페미니즘 문학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말린체 신화'가 있다. 말린체란 여성은 스페인에서 온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의 노예로 들어가 그의 정부이자 통역자였다. 말린체는 통역자로 활동하면서 에르난 코르테스가 멕시코를 정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녀는 후에 두 가지의 상반된 평가를 받게 되었는데, 남성중심적 성향의 학자들은 말린체를 침략자에게 몸을 판 창녀이자 배반자로 평가했다. 반대로 페미니즘에서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다국어를 구사하는 글로벌한 인물로 평가하면서 라틴 아메리카의 문학에서 주체적인 여성의 모티브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그을린 사랑>의 주인공 나왈 마르완도 남성중심의 격동의 시대에서 주체적인 삶을 관철한 것을 볼 때 말린체와 유사한 점이 상당히 많다. 드니 빌뵈브 감독이 말린체 신화에서 모티브를 얻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둘의 연관성은 충분히 흥미롭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볼 때, 이 영화는 여성을 중심으로 전쟁의 비극을 표현해내면서도 결국에는 여성은 전쟁의 피해자일 뿐 사회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 나약한 피해자로만 그려내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나왈 마르완이 전쟁 동안 기독교 민병대 지도자를 암살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지만 그 결과는 가혹한 폭력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었으며 여성이 전쟁의 도구로 이용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마르완의 모습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며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희생당하는 <닥터 지바고>와는 다르다. 나왈 마르완을 행동하게 하는 그 동기에 있어서는 사회에 순응하여 아무런 이유 없이 이용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여성 개인의 의지(그것이 복수심 때문이라고 할지라도)에 의한 선택이었다는 것은 영화의 시대적, 사회적 배경을 생각했을 때 이 영화가 어느 정도 주체적인 여성상을 보여주는데 중심을 잃지 않았다.   

 영화의 카메라는 주인공을 프레임 가득 클로즈업 하면서 전쟁과 비극적인 운명을 겪는 개인의 복잡한 감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와 동시에 레바논의 황량한 풍경 속에 점 하나 찍힌 것처럼 보여주면서 거대한 역사 속에서 희생당하고 지워지는 개인 또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 어머니 마르완과 딸 잔느를 계속해서 교차적으로 배치시키면서 과거와 현재가 서로 독립적인 관계가 아니라 유기적이고 지속적인 관계에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영화의 중간 중간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눈에 확 띄는 자막으로 삽입하면서 복잡한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인물들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장치를 통해 관객들이 영화 속 인물과 동일화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차단하고 관객들은 영화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 밖으로 나와 주인공의 행적을 잔느와 함께 쫓아가는 역할을 부여받게 되면서 관객 나름대로 영화 속 이야기를 인식하고 해석하게끔 한다. 또한 영화 초반부와 중반부에 흘러나오는 두 곡의 라디오헤드의 노래를 제외하고는 배경음악이 전혀 없는 것은 음악을 이용해 관객들에게 감정을 강요하기보다는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영화를 바라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을 저술하면서 서사시의 결정체인 비극은 개연성, 필연성을 가지고 미메시스를 수행해야 연민과 공포의 카타르시스를 일으킨다고 하였다. 개연성과 필연성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가 감상자의 감정을 고양시키고 순화시킨다는 것이다. <그을린 사랑>의 거대한 전쟁 속에서 ‘노래하는 여인’으로 영웅적인 인생을 살아온 나왈 마르완을 통해 이야기되는 내러티브적인 특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서사의 비극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중요한 반전이 개연성과 필연성의 미메시스를 수행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극단적이고 충격적인 반전과 주인공의 독백으로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 개연과 필연을 결여하고도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었던 까닭은 이 영화가 이제는 다소 식상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모티브로 한 우연적인 장치를 이용해 개인의 개별적인 감정을 표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가 반복해온 폭력의 순환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감정, 그 중에서도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감정인 사랑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격렬한 카타르시스를 관객들에게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 영화의 감독은 나왈 마르완이란 여성이 상실, 살인, 고문, 강간, 근친상간까지 감당하게하면서 전쟁 속의 주인공 여성을 학대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극단적인 상황에도 여성은 가혹한 모든 것을 인내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과 전쟁을 배경으로 한 기존의 많은 영화들이 보여준 역사 속에서 희생당하는 개인의 운명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 영화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싶은 것은 전쟁의 참혹함과 폭력보다도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위대한 사랑이다. 그리고 이러한 초월적인 사랑은 신성한 여성의 모성애를 통해 표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보여준 위대한 사랑은 전쟁의 폭력과 충격적인 비극에 검게 그을렸지만 '함께할 수 있어 좋구나.'라는 유언장의 마지막 대사처럼 그 본질은 변하지 않으며 일 더하기 일은 일이라는 비논리적인 명제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2011. 09.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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