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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2일차

by 안종익


첫날 묵은 알베르게는 내가 잔 방에만 50명 이상인 것 같다.

아침이 되니까 새벽잠이 없는 노인들이 많아서 일찍 일어나 출발도 빨랐다.

어둑한데도 남들이 출발하니까 나도 생각 없이 따라나섰다. 아직도 달이 떠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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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일찍 출발해야 햇볕이 덜 따가울 때 다음 숙소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도 바쁜 것도 없고, 걸음도 보통 이상이어서 일찍 출발할 필요가 없었다. 내일부터는 조금 여유를 가졌으면 한다.

어두운 길이지만 숲이 우거져, 숲 터널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만일 햇볕이 있는 낮에 이 길을 걷는다면 햇볕을 가려주는 멋진 길일 것이다.

한참을 가다가 보니까 고사리가 온 들에 널려 있다. 고사리가 벌써 너무 자라서 모두 핀 상태였다. 여기 사람들은 고사리를 먹지 않는 것 같다.


고사리를 보니까 갑자기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우리 모친이 고향에 계실 때 고사리를 많이 꺾었고, 남보다 일찍 고사리밭에 가려고 동네 또래 할머니들과 봄이면 경쟁하던 모습이 선하다.

모친은 다정한 성격은 아니고 고집과 집착이 있는 분이었다. 그래도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아니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청춘에 혼자되어서 자식들에게 올인한 인생이었다. 그런 모친에게 나도 다정하게 대하지 못한 것이 자식이 부모를 닮은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모친에게 잘한 것은 없고, 못한 것만 기억나서 마음이 아프다.


할아버지도 고사리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산에 할아버지만 아는 고사리밭이 있었던 것이다. 봄이면 그 밭에서 고사리를 꺾어 오셨고, 고사리 철이 지나면 나물도 뜯어 오시던 할아버지였다. 그런 할아버지도 생각나는 사람이다. 삶의 목표가 손자들을 먹여 살리는 것으로 나처럼 뒤를 돌아보고 또 다른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어서 하루하루 열심히 사시는 것을 보았다.

증조할머니도 역시 생각나는 분이다. 한평생 흰옷을 정갈하게 입으시고 조용하셨던 할머니는 평생 남을 속여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던 것이 생각난다. 실제로 그렇지는 않더라도 그 말에 근접하게 사셨다.

이렇게 생각나는 사람들은 거의 가족이지만, 가족 중에 부친이나 할머니는 별로 생각나지 않는다.


어둠이 걷히니까 푸른 숲길이 이어지면서 싱그러운 아침 기운이 느껴진다. 멀리 산 밑에 초원에는 말들이 아침 식사를 하는지 부지런히 풀을 뜯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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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들판에는 일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조용한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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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마을을 지날 때, 담장도 창살에 순례의 상징인 조개 모양을 붙여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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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앞에 플라타너스가 너무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다. 이곳에 있는 플라타너스는 내가 보아온 덩치만 크지 볼품이 없는 나무가 아니고, 잘 생긴 나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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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타너스의 원 고향은 이곳이고, 멀리 한국에 와서 덩치만 커지고 원래 아름다운 제 모습을 변한 것 같다.


숲길은 끝없이 이어지고 벌판도 나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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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모르는 나무들이 순례길을 보기 좋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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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에서 순례하는 모녀가 민들레 홀씨를 꺾어 불면서 아이들처럼 깔깔거리며 즐거워한다. 그 웃는 소리가 온 들판에 펴져도 그 웃는 소리가 시끄럽지 않고 정다운 소리로 들린다.


오르막길은 있지만 그렇게 급하지 않고, 오르막을 오르면 평편한 길이 오랫동안 계속되는 길이어서 힘들지 않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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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순례길은 오르막을 올라갈 때 힘이 들었지만, 다음에 나오는 평편한 길을 한참을 걷다가 다시 오르막이 나오는 구조의 길이다.

오르막이 끝나면 내리막이 나오고 그 내리막이 끝나면 다시 오르막이 나오는 힘든 그런 길이 아니다.

순례자들이 이 길을 오는 이유가 아름답고 걷기가 좋은 길이기 때문인 것 같다. 신앙을 위한 순례자가 아니라도 많이 찾는 이유가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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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걷다가 작은 순례 표시가 있는 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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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순례객들이 인사를 잊지 않고 하고 지나간다. 거의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덕담일 것이다. 그래서 나도 “하이” 하고 대답도 내가 먼저 “하이”라고 인사도 한다.


그 옛날 순례자들은 지금처럼 잘 만들어진 스틱이 짚고 다니질 않았을 것이다. 순례자들은 이 길에 있는 나뭇가지를 주어서 짚고 다녔을 것이다. 그래서 짚고 다니기 적당한 막대기를 주어서 짚었다.

그 옛날 순례자를 생각하면서 허리도 약간 굽혀서 걸어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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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례길은 시간이 지나야 끝나는 길이므로 쉼 없이 가는 방법이 최선이다. 물론 자기 몸에 적합하게 속도를 내어야 한다.


오늘은 한국에서 혼자 온 여자 순례객을 만났다. 혼자서 배낭도 무거워 보였는데, 그것도 두 개나 메고 가고 있다. 무슨 고행의 길을 가는지 힘들어 보인다. 같이 동행을 할 수도 있지만, 얼굴에 쓰인 것이 혼자 걷고 싶어 하는 마음이 눈에 보였다.

같이 걷고 싶은 사람도 없고 오직 혼자서 가고 싶은 마음인 것 같다. 인사하고는 지나쳐 앞으로 걸어 나갔다.


생각나는 사람이 내게 좋은 인상을 준 사람도 있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생각이 나는 사람이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반에서 돈을 잃어버린 여학생이 있었다. 그때 내게 돈이 있었다.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는데, 담임이 나를 도둑으로 몰았던 적이 있다. 아직도 억울함이 남아 있고, 그 담임 선생님을 아직도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다.

또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하면서 수십 년을 마음 터놓고 이야기하던 동료가 나에게 당연히 해야 할 도리를 작은 이익 때문에 모른 척하는 이기적인 인간의 마음을 보인 동료도 생각나는 사람이다. 생각은 좋은 것만 아니라 나쁜 것도 나지만, 내가 잘한 것보다 못한 것이 더 나는 것이다.


결국 많이 생각나는 것은 가족이지만, 잊지 못하는 친구도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전학 간 친구가 아직도 생각나고, 고향에서 같이 학교를 다닌 초등학교 친구들은 늘 생각나는 사람들이다. 결국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많이 본 가족이나 친구가 생각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다 보면 현재의 가족들도 늘 생각나는 사람들이다.

오래 같이 생활하고 보아 온 사람들이 생각이 나지만, 그중에서 특별한 관계가 있었거나 사연이나 곡절이 있어야 생각난다고 할 수 있다.

가족이 생각나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은 긴밀한 관계와 사연이 있는 공통의 삶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나는 사람에게 더 예의를 지키고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해야 하는데, 방심하다가 지나고 후회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산티아고 순례길 둘째 날은 대체로 길이 순하고 걷기가 좋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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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름의 깔딱 고개는 있었지만 그렇게 숨을 차게 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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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인 주비리 마을에 가까워질 때에 찔레꽃이 만발해 있었다. 그 찔레꽃이 코스모스 꽃처럼 큰 것이 눈길이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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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숙소 마을 지붕이 보이는 곳에 마지막 가리비 표지석 위에 돌탑이 쌓여 있다. 나도 그곳에 가장 높은 곳에 돌 하나 올려놓았다. 누가 내 돌 위에 다시 돌을 올리기 전에는 내 돌이 가장 높은 곳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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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내가 그랬듯이 내 위에 또 다른 돌이 올려질 것이다.


도착한 주비리 마을은 제법 큰 개울이 흐르는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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