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낯선 섬에서 아침을 기다린다.
내가 갈 곳은 정해져 있지만, 이곳에서 잠시 머물다가 가야 할 곳으로 갈 것이다.
먼동이 뜰 무렵에 도착해서 밝아 오는 새날을 기다리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밖을 바라본다. 푸꾸옥 섬에서 맞이한 아침은 겨울비가 차분히 내리고 있다. 비가 내리니 공항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내리는 겨울비를 무심한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낯선 공항에서 바람 한 점 없이 조용히 내리는 겨울비는 내 마음을 적시면서 옛 시절 소년의 감성이 되살아 난다.
소년 시절에는 한없는 희망으로 모든 것이 좋게 보이던 시절이었다. 아름다운 소녀를 상상하면서 늘 봄날 같은 마음으로 살고 싶었던 시절이기도 하였다. 그 시절도 내리는 비를 보면서 울적 해면서 애틋한 감성에 젖어들던 때가 많았다. 비가 조용히 내리면, 마음은 차분해지면서 말할 수 없지만, 잊지 못할 추억을 내게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의 마음이 간절했다. “소나기”의 소녀 같은 소녀를 만나서 잊을 수 없는 사연을 갖고 싶었던 생각이 순수한 바람의 추억이었던 것을 이제 알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날은 완연히 밝아 왔지만, 겨울비는 더 굵어지고 있다. 내리는 비를 멀리 야자수 나무가 온몸으로 적시면서 서 있다. 처음 온 섬을 구경하려던 것을 비가 그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공항 안에서 계속 기다릴 것이다.
긴 세월 속에 무심한 시간은 흘러서 이제 젊어서 처음 일을 시작하려던 때와 같이 백수로 돌아와 있다. 이제 다시 시작할 때도 아니고 세월과 함께 흘러가야 할 시기이다. 그저 마음을 내려놓으려고 애쓰면서 알 수 없는 의미를 생각하며 살아갈 것이다.
여행을 다니면서 빈 가슴을 채워보려고 열심히 걸어 보았지만, 예전처럼 가슴도 뛰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 조용히 지내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들기만 한다. 그래도 시작하니까 끝이 있고 또 다른 곳에는 색다른 의미의 느낌이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다시 시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여행을 마치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면서 낯선 공항에서 맞이하는 겨울비는 내 마음을 한없이 차분하게 하고 여행에 지친 마음을 후련하게 씻어 내리는 듯하다. 이렇게 흔들리는 나뭇잎 하나 없이 안갯속에 비가 내리고 있다. 겨울비답지 않게 훈훈한 공기가 돌아서 날씨가 포근하다.
이번 길에서는 삶의 유한함을 느끼게 하는 여행이었고, 모두 살아가는 삶이 별것 아니고 큰 차이도 없이 비슷하게 살면서 너무 애쓰며 산다는 것도 알 것 같았다.
트레킹 하면서 가장 높은 곳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말로 표현은 못 하지만, 힘들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알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와 그곳에서 어느 누구 나를 도와줄 사람도 없고, 오직 나만이 내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보낸 하룻밤이다. 그렇게 심한 고통도 아니면서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을 받으면서 보통 사람의 끝도 그런 마음으로 마지막을 보낼 것 같은 인간의 마지막 순간을 경험했던 밤이었다.
그런 밤도 아침이 언제 올 것인가 끝없이 기다렸지만, 아침이 올 때는 순식간 아침이 되어 또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무겁지 않은 배낭을 메고,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올라가도 힘이 들어서 고생스러웠다. 자기보다 훨씬 큰 짐을 지고 오르막 계단을 오르는 포터들의 표정에서는 그렇게 어려운 기색보다는 살아가는 방법이 그것이고, 얼굴에 힘든 표정보다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때는 행복한 미소마저 볼 수 있었다.
난방이 되지 않는 방이 바람만 막아주는 곳이지만, 그런 곳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이 춥다는 것을 못 느끼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두꺼운 옷을 여러 겹 입고도 추워서 잠을 자지 못하고 오직 춥다는 생각이 가득했던 것이 환경보다는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도로 가운데서 구걸하는 어린아이의 간절한 얼굴이나 높은 담장 안에서 한가로이 벤치 앉아 쉬고 있는 배 나온 어른의 표정은 모두가 그들만의 삶의 얼굴이었다.
어떻게 살든 간에 누구와 비교할 수 있는 더 나은 삶은 없었고, 모두가 자기의 삶이고 특별한 인간의 삶은 없다는 것을 생각게 하는 여행이었다.
가장 높은 롯지에서 보내던 밤에 비몽사몽 간 꿈속에 광대뼈가 나오고 볼이 들어간 마른 모습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열심히 남보다 잘 살려고, 무단히도 애쓰다가 돌아가신 분의 얼굴이다.
며칠 지내고 높은 사원에 가서 구경하다가 사람들이 어딘가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은 곳이 있어 따라 올라갔다.
그곳은 그 사원의 노승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불경을 읽어 주면서 불법을 전하는 자리였다. 서양인들이 노승 앞에서 공손히 합장을 하고 불법을 듣는 표정이 진지하면서도 엄숙하다.
그 장면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노승과 듣는 사람 뒤편에 앉아서 노승의 시중과 말씀을 기록하는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승려가 보인다. 그 얼굴에 유난히도 눈길이 가서 자세히 바라보니까 며칠 전에 꿈속에서 보았던 그 얼굴이었다.
돌아가신 삼촌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윤회는 믿지 않지만 애쓰면서 사는 우리의 삶은 여러 곳에서 닮아 있는 것이다. 살려고 애쓰시다 돌아가신 삼촌이 이 먼 곳에 만난 것 같고, 모든 인간의 삶은 닮아 있고 별다른 것 없이 비슷하다는 것을 마음으로 느껴 본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을 시간에도 비는 꾸준히 내린다. 이제 안개는 걷히고 심하게 오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가늘어지지도 않고, 비는 계속 내린다. 간혹 바다의 해풍인 것 같은 훈훈한 바람이 불어온다. 겨울비가 아닌 것처럼 포근하고 훈훈한 바람이다.
이제는 야자수 나무들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그래도 가벼운 움직임이지 가지가 전체로 흔들리지는 않는다. 낯선 섬에서 아무도 모르는 이방인들만 오가는 곳에서 차분히 내리는 겨울비가 나를 돌아보게 한다.
이 여행이 끝나면 더 성숙한 삶을 살아가리라 생각도 해 보지만, 천성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비는 예전부터 마음을 설레게 하고 감성에 빠져들게 하였다. 비 오는 날은 기분이 울적하면서도 좋은 마음이 드는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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