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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종익 May 24. 2023

동해안의 항구들

묵호에서 시작한 34코스는 묵호항을 지날 때 묵호항 쪽으로 들어가 구경을 하다가 해파랑길 표시가 보이지 않아 다시 돌아 나와 길을 찾았다. 묵호항 쪽으로 그대로 갔어도 표시를 만날 수 있었지만, 지난번에 길을 잃어서 혼난 기억 때문에 다시 돌아가서 길을 찾은 것이다. 

묵호항 주변은 사람들이 많이 살다가 떠난 느낌이 들었고, 문 닫은 옷 수선집 간판이나 국숫집, 이발소 간판에서 발전이 멈춘 느낌을 받는다. 실제로 묵호가 동해안의 고기잡이 항으로 가장 번성했지만 가까운 동해항이 발달함에 따라 쇠퇴기를 맞았다고 한다. 

그래도 묵호항 어판장에는 아직도 활기가 있었고 활어를 파는 아주머니도 사려고 온 사람들이 많고 시끌벅적하다. 묵호항 바로 옆에 있는 수변공원에서 화살표는 골목길로 안내한다. 그 길이 등대오름길이다. 등대까지 올라가는 길은 좁고 가파르다. 여기는 벽화가 많이 그려져 있고 옛 정취가 묻어 있어서 구경하면서 올라가니까 지루하지 않았다. 

등대를 올라가니까 묵호항이나 묵호가 한눈에 들어오고 넓은 바다는 가슴을 탁 트이게 만든다. 젊은 연인끼리 올라와서 정상에 있는 카페에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차 한잔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등대에서 내려오면 해안 길이다. 바다 위 해안 길을 따라 계속 가면 어달항이 나온다. 어달항까지는 펜션이나 카페가 많았다. 어달항과 비슷한 항구로 대진항이 나오고, 다음은 망상해수욕장이다. 망상해수욕장은 삼척의 맹방 해수욕장처럼 큰 해수욕장이고 위치나 경관도 뛰어난 곳이다. 모래밭도 잘 다듬어져 있고 서핑하기에 좋은 곳으로 서핑 장비가 많이 보인다. 

망상해수욕장을 지나면 7번 국도 옆길을 따라가는 중간에 강릉시와 경계 간판이 보인다. 

 

강릉으로 들어와 해변을 가다가 보니까 차들이 전혀 오지 않고 나 혼자만 해변 도로 걷고 있다. 금진항을 한참이나 지났는데 차뿐만 아니라 사람도 전혀 다니지 않는다. 큰 해변 도로를 나 혼자 걸어가고 있다. 오늘은 어제보다 날씨가 많이 풀려서 걷기도 좋고 파도 소리 외에는 조용한 길을 혼자서 걸었다. 

차와 사람이 오지 않은 이유를 심곡항에 가서 알았다. 파도가 도로로 넘어오기 때문에 도로를 통제한 것이다. 금진항에서 심곡항 사이의 도로가 심한 파도로 차단이 되었지만, 내가 금진항을 지나오고 난 뒤에 차단된 것이다. 그러니 차와 사람이 다니지 못하는 해변 도로를 홀로 걸어서 온 것이다. 

 

심곡항에서 다시 산길로 가서 정동진항을 지나 정동진에 도착했다. 정동진에는 연인들과 친구들끼리 즐겁게 웃고 놀고 있다. 젊은 연인끼리 정답게 손을 잡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청춘의 아름다움이 보이고 보기 좋은 모습이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을 것이고 이제는 자식들이 이런 곳에서 저렇게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정동진 해변의 모래사장 그네에서 맑은 아이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네 타는 아이와 밀어주는 엄마의 풍경이 정답고 평화롭다. 저렇게 어린아이 때가 귀엽고 좋은 시절이었는데, 시간은 너무 빨리 갔다. 우리 아이들은 이제 어른이 되어 자주 보지도 못한다. 아이들은 보살펴 줄 수 있을 때가 젊고 좋은 시절이었다. 

 

해파랑길을 걸을 때 길 표식을 항상 찾으면서 걷는다. 표식이 보이지 않으면 길을 잘못 가고 있는 것이다. 이 표식을 오랫동안 찾다 보니까 나름 요령이 생긴다. 

멀리 보는 것이다. 가까이 가 찾으려 하지 말고, 눈을 멀리 보면 리본이 펄럭이거나 붉은 화살표가 보인다. 이렇게 멀리 보는 습관을 들이면 그냥 계속 걸으면서 큰 움직임이 없이도 찾을 수가 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멀리 보는 습관이 여유가 있고 쉽게 사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바다가 보이는 강릉은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곳이라는 것이 실감 난다. 

남향진에서 다리를 건너 안목 커피 거리에 나오니, 보이는 것은 끝없는 모래사장과 해송이다. 

안목 커피 거리는 오늘이 일요일이라서 건물마다 손님들이 다 차 있고, 해안에도 사람들이 북적인다. 해송들이 너무 잘 가꾸어져 있다. 이런 해송이 있는 해수욕장은 사람들은 불러들이는 것이다. 

해송이 안목에서 시작해서 경포해수욕장까지 긴 거리에 잘 조성되어 있고, 그 해송 사이로 해안 도로가 있어서 차로 가도 좋은 드라이브 코스이다. 경포해수욕장을 지나도 해송은 계속 이어져 있었고, 건물이나 도로로 인하여 없는 구간도 있지만, 강릉은 가능한 곳을 모두 해송으로 방풍림을 만든 것 같다. 

 

송정해수욕장 앞의 모래도 일품이지만, 이곳은 해송이 가장 많은 곳이라서 여름에는 해수욕보다 해송 숲을 걷는 것이 더 시원할 것 같다. 

강릉의 해수욕장들은 구분해 놓았지만, 실제로 연결된 하나의 해수욕장인 것이다. 그중에 경포대 해수욕장이 대표적인 이름이다.

 

경포대 해수욕장 끝자락에 약간 넓은 테크 길 위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젊은 여자아이 두 명이 춤을 추고 있었다.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들은 내가 지나가는 데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춤을 춘다. 앞에는 춤추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되도록 스마트폰을 거치해 놓고 추고 있었다. 잘 추거나 연습한 춤도 아니고 거의 막춤인데, 열심히 하는 모습을 한동안 쳐다보았다. 요즈음 세대들은 저렇게 확실히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같다. 

아마 저렇게 만든 동영상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거나 아니면 본인들이 추억으로 간직할 것이다. 정말 열심히 사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잘 추지도 못하는 춤이 부끄럽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도 그동안 걸으면서 무엇을 하든지 부지런히 해야 행복도 온다는 것을 알았다. 

 

경포대 해변을 지나면 해송이 없는 해안 길도 걷고, 차도와 같이 가다 보면 사천진항이 나온다. 이 항구는 제법 큰 항구이지만 주변에 물회를 하는 집이 모여 있는 곳이다. 입구에 사천 물회 마을이라고 쓰여 있고, 이곳 물회가 유명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에 늦은 점심을 물회로 했다. 

다시 주문진항이 보이는 해안 길에 들어오니까 차들도 많이 다니고, 사람들도 일요일 오후라서 많았다. 주문진 해변에는 유명한 드라마 촬영지가 있어서 그곳에 사람들이 몰려 있다. 사람들이 몰리는 곳에는 어김없이 시설 좋은 대형 카페가 자리하고 있었다. 

 

걸으면서 자주 생각한 것이 있다면, 우리는 끝까지 부지런히 움직여야 보람도 느끼고 행복도 생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열심히 해야 하고, 심지어 놀더라고 열심히 놀아야 한다. 

지금까지 걸으면서 아픈 곳만 생긴 것은 아니고 살아가는 지혜를 느낄 때도 있었다. 세상은 만만하지 않고 방심하면 창피당하기 너무 쉽다는 것과 사람 사는 것이 대체로 비슷하다는 것이다. 가족을 포함해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쉬운 사람이 아니고 가장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오늘은 증조모님의 기일이다. 묵는 곳에서 과일과 포를 준비해서 술 한 잔을 올릴 생각이다. 나에게 가장 잘해 준 할머니이다. 나를 위해서 애쓰신 할머니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사람은 자기가 입은 덕을 잊으면 안 되지만, 자기가 베푼 덕을 기억하면 아쉬움을 갖기 때문에 베푼 것은 잊어야 한다. 

며칠 전은 할아버지 기일이었는데, 옛말에 없는 사람 제사 다가온다는 말이 있다. 걷는 중에 기일이 두 번이나 찾아와서 객지에서 모신다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앞으로 내가 사는 동안 조상의 기일은 꼭 챙길 것이다.

오늘은 주문진에서 기일 음식을 준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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