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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종익 May 24. 2023

해파랑길 종점에 왔다

해파랑길은 종점이 가까워지고 있다. 이 길을 마치고 어디로 갈 것인지는 아직 정하지 못하고 있다. 

불현듯 미국의 작가가 쓴 “노란 손수건”이라는 단편소설이 생각난다. 감옥에서 나와 자기 고향을 지나는 기차를 타고 가면서 고향마을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이 하나 걸려 있으면 하차하고, 없으면 고향에 내리지 않고 계속 기차를 타고 갈 생각이었다. 물론 고향마을 참나무에 손수건이 걸리는 것은 사연과 곡절이 있는 것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고향이 다가오자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이 하나가 아니고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는 내용이다. 많이 걸어 놓은 것은 혹시 하나 걸어 놓으면 못 보고 지나칠까 봐 그랬을 것이다. 

나도 그런 사연은 아니지만,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 봤다.


양양군의 해파랑길은 시원하게 일직선으로 가고 있다.

양양에 들어와서 앞에 있는 설악산은 웅장하고 자태가 걷는 동안 시선을 압도한다. 

아직 설악산에는 눈이 덮여 있고 그 줄기가 우뚝 솟아서 양양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하다. 

여기서 설악산이 모든 볼거리 중 으뜸이다.

설악산은 젊어서 친구들과 같이 오른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산에 눈이 덮여서 봉정암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눈이 많아 등산객 대부분은 봉정암에서 하산하고, 같이 간 세 명만 눈 덮인 정상을 올랐었다. 그때 무리하게 등반한 것은 젊어서 그랬고, 또다시 못 올 것 같아서 온 김에 올라간 것이다.

그 뒤에 다시 오른 적이 있다. 아들과 같이 늦은 봄에 오른 것이다. 이날은 일출을 보려고 새벽에 소청대피소에서 출발해서 날씨가 흐려서 보지 못하고 내려왔지만, 다시 찾은 대청봉은 아들과 추억을 만들어주어서 좋은 곳이었다. 오늘은 이렇게 올려다보기만 할 뿐일 것이다. 


낙산대교를 넘어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눈에는 눈물까지 나게 만든다. 

현재 걷고 있지만 영하의 날씨이고 바람이 정면으로 불어오니까 그 체감온도는 거의 동상이나 어디 신체 부위가 얼어서 이상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다. 추위에 참을 수 있는 인내의 한계를 경험하는 중이다. 이 바람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 공기이고, 나는 북쪽으로 가니까 정면으로 맞으면서 가는 것이다. 바람은 한결같이 맞바람이 분다. 이렇게 고생해서 무엇을 얻으려 걷는지 다시 한번 생각게 한다. 하도 추워서 낙산 해변의 아름다움도 낙산사도 들어갈 마음이 없이 그냥 해변을 벗어나고 싶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이렇게 추운 날 나이 들어 개고생 했다는 것은 잊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것만 기억해도 이번 걷기는 얻는 것이 있는 것이다.


양양에서는 들어오는 초입에서부터 보이는 글이 마음에 닿는다. 

“고맙다 양양”이라는 말은 처음 보는 순간부터 참 따뜻하고 정 있는 고장이라는 느낌을 준다. 양양에는 “송어와 연어의 고장”이라는 슬로건도 있지만, “고맙다 양양”이 시내버스 정류장이나 공공기관에 거의 쓰여 있다.

내가 만일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삶의 고마움을 느꼈다면 나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아직 그것을 마음으로 느끼지 못했다. 

고맙다는 말은 감사하다는 또 다른 표현이다. 세상에 감사하면 모든 일이 긍정적이고 행복한 일이 되는 것이다. 감사는 사랑이나 희망보다도 더 쉽게 행복에 이르는 비결이다.

양양이 무슨 전통의 도시, 무슨 최고의 고장이라고 선전하는 것보다 슬로건을 “고맙다 양양”을 선택한 것은 탁월한 것이고 이곳에 사는 분들이 선량하고 행복한 분들이 많을 것 같다.


파도가 치면 몽돌이 소리를 내는 해변을 걸었다. 귀를 기울여서 들어보니 소리가 많이 들린다. 파도가 쳐서 나오면서 몽돌을 해변으로 몰았다가 들어가면서 다시 바다로 밀고 가면서 몽돌끼리 서로 부딪치는 소리이다. 몽돌이 부딪치는 소리가 몽돌 소리길로 이름 지어서 부르는 것이 참 신선하다. 해변에는 수많은 몽돌이 있지만 이렇게 이름 지어서 불리는 이곳의 몽돌은 특별한 몽돌이 된 것이다. 

몽돌의 부드러운 곡선은 수천 년 바닷물이 몽돌을 굴려서 깎아 만든 것이다. 바닷물보다 몽돌끼리 부딪친 것이 더 큰 작용을 했을 것이다. 


이곳까지 오면서 많은 조각상을 만났지만, 속초 바닷가 갯바위에 조각된 인어 연인상이 인상 깊다. 옛날 이 마을에 처녀와 총각이 살았는데, 어느 날 총각이 바다에 고기잡이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처녀는 이 바위에서 기다리며 그리워하다가 끝내 세상을 떠났다는 안타까운 이야기 전해지고 있다. 그런 사연이 있는 이곳에 총각과 처녀를 인어상으로 만들어서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 “사랑의 연인상”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실제 인어 이야기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었지만, 여기는 처녀와 총각의 사랑이 이루어진 인어 연인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는 완벽한 사랑을 찾는 연인들이 이 연인상을 보러 찾아온다고 한다.


속초 아바이 순대 마을을 지날 때는 그 많은 순댓집 중에 한 집만 줄을 서고 나머지는 사람이 찾지 않는 식당을 보면서 잘하는 집이나 원조인 집은 어디 가도 있는 것 같다. 갯배 선착장에서 갯배를 타고 건너서 속초항과 동명항을 부두를 따라서 계속 걸으니까 영랑호가 나온다. 영랑호가 보기에는 크지 않았지만 걸어보니까 너무 넓은 호수다.


송지호가 끝나갈 지점에 다시 송지호 산소길이 나온다. 소나무 사이로 조성된 길은 맑은 공기와 조용해서 걷기는 그만이다. 날씨는 차지만 이 길에서 오랜만에 마스크를 벗고 마음껏 공기를 드려 마셨다. 소나무 사이로 계속 갈 것 같던 길에서 갑자기 초가집이 보이고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마을이 나온다. 조용하고 아늑한 시골 마을의 풍경은 추운 날씨에도 바람이 불지 않으니까 봄이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이 마을은 가만히 보니까 전봇대가 없었다. 만일에 전봇대가 마을에 몇 개라고 있었으면 이런 느낌을 못 느꼈을 것이다. 또 초가지붕은 민속촌에 가면 나일론으로 만든 가짜 볏짚이 아니라 진짜 볏짚으로 만든 것이다. 자연스럽게 잘 조성된 국가 민속 문화재 고성 왕곡마을이다. 


걷는 동안에 힘이 들고 추워서 어려웠지만 그래도 끝이 다가온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끝이 있는 것이다. 걸으면서 또 하나 얻은 것은 끝이 있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한 것이다. 끝이 있는 길을 가면서 너무 서두르지 말고 여유 있게 가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해변 길을 걸으면서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마지막 즈음에 한없이 눈물이 나 펑펑 울면서 걸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길은 순례자의 길이니까 종교적으로 뉘우침이나 참회의 눈물일 수도 있고, 걸으면서 어떤 느낌을 받아서 그렇게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런 눈물은 의미가 있고 본인에게 감동과 산티아고의 긴 길을 걸으면서 힘들게 걸은 보람이 주는 눈물일 것이다. 


나는 해파랑길 마지막을 걷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눈물을 생각하니까 갑자기 진지해진다. 

나는 살아오면서 진실한 나로 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 자신에게 솔직하게 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 자신에게 솔직하게 살지 못한 나 자신을 내가 용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돈다. 찬바람에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느끼는 눈물이다. 용서는 용기가 있어야 하고 지금 그런 용기를 간절히 바란다.

잘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정한 나 자신으로 살아야 한다. 나의 모습은 내가 살고자 하는 진실한 나 자신이어야 한다.


음력으로 지난해 섣달그믐날 출발한 해파랑길을 지금 마지막 지점으로 가고 있다. 해파랑길의 막바지에 응봉을 만났다. 응봉은 해발 122m의 작은 산이다. 그냥 야산으로 생각하고 올랐는데 멋진 전경이 보이고 감탄이 나오는 봉우리다. 화진포 호수가 보이고 해변과 금강산과 해금강이 보이는 곳이다. 


통일 전망대는 검문소부터 통해서 도착했다.

26일간 770Km를 걸어온 것이다. 전 구간을 도보로 착실히 걸었다. 도중에 길을 잃어서 다른 길로 가기도 했지만, 다시 돌아가 걸었고, 어떤 곳은 다른 길로 가서 더 많이 걷기도 했다. 날씨는 아직도 여전히 춥다.

소설 “노란 손수건”처럼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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