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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종익 Dec 07. 2023

노인정의 시간 1

가을걷이 마치고 나면 찬 바람 부는 계절에 노인들은 노인정에 모인다. 

농사철에는 노인들이지만 지금까지 해온 농사일을 그만두지 못하고, 걷기가 불편해도 농사일은 소일하듯이 쉬지 않는다. 그렇지만 농사철에도 경로당에 모이는 날이 있다. 비 오는 날이나 노인 일자리 있는 날이다. 

노인들은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이던 농사철이 지나고, 이젠 농한기라 경로당에 모여 놀다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간다. 요즈음은 점심까지 경로당에서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오늘도 경로당 문은 열려 있다.


바람 불어 조금은 추운 날인데, 노인들이 간간이 경로당으로 가는 모습이 보인다.

지금쯤은 어느 정도 모여서 한판 벌어졌을 시간이다. 그런데 그때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노인정에서 온 전화였다. 나를 노인정으로 오라고 한다.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아서 지갑을 찾아 주머니에 넣고 노인정으로 갔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는데, 화투놀이할 사람이 부족해서 호출한 것이다. 

나도 환갑은 넘었지만, 노인정에 갈 나이는 아닌데 가끔 이런 경우를 있다. 노인정에 가면 어느 정도 나이가 많은 사람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나는 늘 막내를 면치 못하고 심부름을 하지 않으면 눈치가 보여서 노인정에 잘 가지 않는다. 

오늘도 예상이 맞았다. 다섯 명이 있어야 화투놀이가 재미있는데 한 사람이 부족했던 것이다. 


노인들은 화투로 고스톱이나 도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기본인 민화투를 한다. 민화투는 화투에 글린 그림을 보고, 같은 것을 맞추어서 가장 점수가 많은 사람이 이기는 방법이다. 한 번에 천 원씩 걸고 하기에 별 부담이 없는데도 노인들은 승부에 양보가 없다.

민화투를 네 명이 쳐도 되지만, 그렇게 치면 다섯 명이 치는 것보다 덜 흥미롭다. 네 명이 치면 가장 낮은 점수가 일등에게 천 원을 주고, 중간에 두 명은 돈 내지 않고 다시 하는 것이다. 

다섯 명이 쳐야 점수가 많은 두 사람이 점수가 낮은 두 사람에게 천 원씩 받고, 중간 점수 한 명은 그냥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네 사람이 할 때보다 돈의 흐름이 빠르고 더 흥미가 있다. 이때 방심하면 만원 잃기는 잠깐이다. 


노인들의 신경전도 심하다. 이런 민화투는 머리를 쓰거나 계산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손에 들어오는 화투패를 좌우하고 또 제침이 결정 짔는다. 간혹 상대방이 실수하는 경우는 덕을 보기도 한다. 그러니 상대방 실수만 바라는 경우가 많지만, 수 십 년을 화투해 왔기 때문에 실수는 거의 없고 오직 그날 운에 따라 승부가 엇갈린다. 손에 들어오는 패를 보면 무엇부터 치고 내어야 하는지 거의 정해져 있다. 


노인들이 화투를 치면 성격이 드러나기도 하고, 간혹 지난날 감정이 살아나서 서로 얼굴을 붉히는 일도 더러는 있다. 그래도 그 자리가 끝나면 잊는 것이 보통이지만, 심각하게 감정이 충돌하면 한동안 경로당에 나오지 않는 사람도 있다. 또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다시 나온다. 혼자서 집에 있기에는 노인들이지만 너무 심심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노인회장이 어제 구천 원을 잃었다고 만회하려고, 상당한 신경전 중이다. 몇 번이나 어제 잃은 돈을 언급하면서 화투패가 잘 들어오지 않는다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그런 말에 신경을 쓰는 노인은 아무도 없다. 오직 손에 쥘 화투패가 잘 들어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목소리가 큰 강 노인이 노인회장이 먹을 패를 먹어 버렸다. 노인회장이 오래간만에 비 삼십이 패에 들어와서 비바를 하려고 했는데, 앞에서 비티로 껍질을 먹었다고 푸념이 길다. 아직도 비 삼십이 나오지 않았는데 비 띠로 비 껍질을 먹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열 내고 있다. 다음에 자기도 다음에 잘라 먹을 것이라고 큰소리친다. 노인회장은 오늘도 벌써 오천 원이나 잃어, 연이틀 소위 화투운은 없다. 그렇게 연속으로 돈을 잃었지만, 다음날은 좋은 운이 올지 모르는 일이다. 사실 노인들이 겨우내 화투해서 돈을 잃는 경우는 거의 없다. 천 원짜리가 왔다 갔다 하니까 거의 비슷하게 유지되는 것이다. 돈보다도 시간 보내기 위해서 노는 것이고, 돈이 오가니까 재미가 있어 화투놀이를 하는 것이다.


화투놀이하면서 오늘 모인 노인 중에서 가장 젊은 정 노인이 한 가지 제안을 한다. 홍 돼지에 돈을 걸어서 자기가 받은 패에 홍 돼지가 있으면 돈을 먹는 게임이다. 

지금과 같이 화투를 계속하면서 추가로 화투 치는 다섯 명이 모두 천 원씩 내고, 화투패를 시작할 때 자기에게 오는 화투패에 칠 열인 홍 돼지 화투가 들어오면 그 오 천 원을 모두 가지고 가는 것이다. 그러니 판이 두 배로 커진 것이다. 

그래도 홍 돼지가 판에 깔리거나 제침 패에 들어가면 다음 판으로 넘어간다. 기존에 천 원씩 걸고 하던 화투는 그대로 계속 돌아가고, 새로 홍 돼지 게임을 하니까 한판에 이천 원으로 늘어나는 것이다. 

홍 돼지 게임을 하기로 하고, 몇 판 돌아가는데 돈의 흐름이 빨라지고 돈이 많이 나가니까 분위기 달라진다. 돈이 많이 나가니까 노인들은 하지 말자는 목소리가 대부분이다. 한판에 이천 원씩 걸면 더 재미있고 긴장되지만, 노인들은 그 돈이 신경 쓰이고 부담이 크다고 생각한 것이다. 


민화투는 단순해서 머리를 쓰는 일이 거의 없어 치매에 그렇게 도움도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민화투를 하지 말고 고스톱을 하자고 객지에서 귀농한 강노인 이 제안했다. 고스톱은 점수 계산도 하고, 상대편이 먹는 것에 따라서 작전도 세워야 하기에 머리를 써야 한다. 그러니 치매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이 귀농한 김노인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고스톱을 칠 줄 아는 노인들이 없었다. 이제까지 도박은 간혹 했지만, 고스톱은 해보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노인이 가르쳐 준다고 하니까 배우고 싶다고 하는 노인들이 없었다. 노인들은 고스톱이 도박이 된다고 하지 말자고 하지만, 그 뒤에는 돈이 많이 잃을 수도 있다는 마음에 지금처럼 부담 없는 민화투를 고수하는 것이다. 


민화투는 걸음을 못 걸어도 일단 노인정에 오기만 하면, 앉아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아픈 곳도 잊을 수 있는 놀이이다. 

노인정에서 화투를 하는 동안은 온갖 시름을 잊고 화투에 집중하는 것이다. 노인들에게 단순하고 머리 쓰지 않고 재미있게 놀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겨우내 화투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노인의 시간은 많지 않지만, 노인정에서 화투하면서 세월은 지나간다. 

지금 시골에 사는 노인들은 노는 것을 많이 배우지 못했다. 더 젊어서는 술을 마시면서 놀 수 있었지만, 지금은 몸이 술을 받지 않으니까 이제 남은 것이 화투놀이다. 그렇게 노인들이 일이 끝나면 하는 놀이가 천 원짜리 화투놀이다. 

노인정에서 만나는 그림은 늘 노인들이 화투는 모습이다. 만나서 화투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날에는 아파서 병원에 가는 노인이 생긴다. 병원에서 돌아오면 다시 노인정에 나와서 늘 하듯이 화투놀이를 하는 것이다. 그다음에 다시 또 병원에 몇 번 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 노인이 생긴다. 


작년에 문어라는 별명을 갖은 노인이 겨우내 노인정에서 놀다가 봄에 나오지 않았다. 농사를 시작할 무렵에 병원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먼 길을 떠난 것이다. 작년에 보이던 문어 노인이 이제는 마을 가까운 산 밑에 누워있다. 노인정에 모인 노인들은 떠난 문어 노인의 빈자리를 서운해하지만, 그렇게 오래 지나지 않아 현실의 받아들인 것이다. 

노인정에 같이 놀던 노인이 아파서 병원에 가면, 볼 날이 멀지 않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자기도 언제 가는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안다. 그래도 노인정에는 무심하게 화투놀이를 하고, 몇 천 원에 언성 높이면서 시간을 보낸다. 노인들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알지만, 달리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노인들은 지금까지 배운 가장 재미있는 놀이를 하면서 가야 할 곳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지내다가 알 수 없는 때가 되면 노인정에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할머니가 모이는 할머니 노인정에는 천 원이 아니고 십 원씩 걸고 화투를 한다. 할머니들도 십 원 보다 백원으로 올려도 그렇게 많지 않는데, 십 원을 고수한다. 할머니들은 이것을 십 원 땡땡이라고 부른다. 

우리 엄마도 그렇게 수 십 년을 겨울이면 화투하러 할머니 노인정에 갔다. 병원에 오가면서도 집에 돌아오면 노인정에 화투하러 갔다. 병원에서 아프면서도 화투놀이는 생각했던 것 같다. 

여러 명 같이 있는 요양병원에 엄마가 입원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적적해서 그랬지만, 그 요양병원에 갈 때 엄마는 화투를 한목 가지고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얼마나 화투놀이를 했는지는 모른다. 그래도 엄마에게 많지 않은 재미있는 놀이가 화투였다. 

지금도 할머니 노인정을 지나다 보면, 아직도 엄마와 같이 화투하던 할머니들이 보이면 한참을 지켜보면서 엄마가 그 속에 있을 것 같아 찾아본다.

아직도 화투놀이라도 할 수 있는 노인이 부럽고 행복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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