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반부 이 작은 엘찰텐 동네는 피츠로이 산행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는 곳이다.
어제저녁부터 내린 눈이 많이 내리지는 않지만, 오랜 시간 내리고 있다. 이곳 피츠로이 트레킹을 파타고니아의 볼거리에서 으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피츠로이산이 이름난 미봉으로 여기 걷는 것을 버킷리스트로 정한 사람도 많다고 한다. 피츠로이를 세계 3대 미봉이라고 하기도 하고, 5대 미봉이라고 하기도 한다.
피츠로이를 보면서 이 신비로운 파타고니아를 걷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지만, 눈 내리는 설산이 구름으로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산행을 원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일기예보 상 내일 날이 맑을 것으로 예상하니까 오늘은 작은 엘찰텐 마을에서 그냥 추운 겨울날 내리는 눈을 보면서 보내고 내일 피츠로이를 오를 생각이다.
여행 떠나오면 일상을 잊고 다녀야 하는데, 어제 연락을 받은 일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면서 아침부터 우울한 마음이 자리를 잡는다.
누워서 지내다가 마음이 답답해서 밖을 나갔다. 찬 공기를 느끼면서 추위가 확 다가온다. 그래도 추우니까 마음에 답답한 생각은 가시는 것 같다.
한참을 밖에 있다가 그냥 눈 내린 피츠로이 산길을 찾아 나섰다. 멀리 입구로 보이는 곳에 차 한 대가 서 있다. 이 눈이 내리는 피츠로이를 올라간 사람은 있는 것 같다.
초행길에 눈이 내리고 길이 잘 보이지 않지만, 앞서간 사람이 발자국이 표시가 난 곳을 찾아 오른다. 앞서간 사람의 발자국도 내린 눈으로 잘 보이지 않지만, 대략 가는 길을 알 수 있다.
처음부터 오르막이라서 숨이 차서 오직 오르는 것에 정신이 모인다. 천하의 절경이라는 피츠로이도 눈 내리는 산길은 나무에 눈꽃이 만들어진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다.
온통 백색 천지이다.
남극에 가까운 남반부에 처음 오르는 산길에는 눈 세상이다.
올라가는 사람이나 내려오는 사람도 만나지 못하고 산속으로 오르기만 한다. 이곳에서 길을 잃고 헤매면 낭패 당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래도 그냥 설산을 올라갔다.
답답한 마음과 지나온 세월에 대한 후회가 왜 지금 일어나는지는 모르지만, 이대로 세상이 끝나도 아쉬운 마음을 못 느낀다. 눈 내리고 추운 겨울이지만 오르막을 쉬지 않고 걸으니까 몸에서 땀이 나는 것을 느낀다. 그렇지만 이 길을 가다가 다시 못 내려오면 곤란하다는 것도 알지만 계속 걷는다. 눈이 많이 내려서 내가 올라온 길이 지워지면 안 된다는 염려도 되지만 그래도 걷는 것에 마음이 간다.
평소 같으면 세계 사람들이 트레킹 하면서 웃고 떠들면서 걷는 길이지만, 지금은 설산에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보이는 않는 백색 세상이다.
그래도 멋진 경관을 보지 못하더라도 눈길로 피치로이 정상까지 갔다가 올 수 있지만, 그것도 서너 시간 전에 출발해야 돌아올 수 있는 먼 길이다.
지금은 출발이 늦어 멀지 않아 어두워지면 정상까지 갔다가는 내려오지 못할 시간이다. 이렇게 눈이 내리고 길이 눈 속에 묻힌 산길은 보통 사람이라면 오르지 않을 것이다.
잊고 싶은 것을 잊어야 하고, 인연이 아니면 연연치 말아야 하는 것이다. 마음대로 될 수 있으면 좋지만 그렇게 되지 않으니까 답답한 마음에 설산을 무작정 오르는 것이다.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도 분명히 잊지만, 그래도 설산을 오르는 것이다. 어떻게 되든지 걷는 것이다.
단순한 삶을 살지 못해서 좋은 여행지에서 마음이 무거운 것이다. 어떤 계기로 잊을 것은 잊고, 내려놓아야 할 것은 내려놓고 싶은 것이다. 피츠로이 설산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무작정 길을 따라 눈 내리는 설산을 오르고 있다.
피츠로이 설산 길은 올라가면서 눈이 더 쌓이는 것이 보인다. 길은 명확히 보이지 않고 올라간 흔적이 조금은 보이고 평소에 많이 다닌 등산로라는 느낌을 따라 오른다.
평소 등산로 흔적은 보이지 않고 산속 길처럼 보이는 곳이 난감하다. 그런 길은 계속 올라가면 등산로 같은 길을 여러 번 다시 만나 올랐다.
무작정 오른다고 속이 후련해지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어느 정도 가서 돌아갈 생각이 났다. 한참 오르니까 인터넷에서 자주 본 이정표가 나온다. 왼쪽으로 가서 라구나 카프리 호수가 나오는 길을 택해서 일단 호수까지 가는 것으로 하고 오른다.
더 눈이 덮인 길을 오르니까 호수가 나온다. 호수에 푸른 물을 보고 싶었지만, 호수도 얼었는지 온통 백색이다.
여기서 피츠로이를 보면 잘 보이는 곳인데, 피츠로이는 전혀 보이지 않은 흰 세상이다. 느낌에 피츠로이 방향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한참 보다가 호수에서 올라와 왔던 길을 다시 찾아서 내려간다. 마음은 아직 답답하지만, 눈이 내리는 설산 피츠로이는 세상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나 홀로 있는 산중이다.
내일은 날씨가 좋아서 원래 피츠로이를 오르기로 한 날이다. 이렇게 내린 눈길이 내일도 그대로 있을 것 같고, 지금 계속 눈이 내리고 밤에도 온다고 하니까 더 쌓일 것이다.
갑자기 돌아서면서 생각난 것은 내일 다시 이 눈길을 올라오는 것이다.
내일은 아침부터 날씨가 맑다고 하니까 설경과 피츠로이 삼각봉을 같이 보면서 올라오는 것이다. 아마 쉽지는 않은 눈길이지만 그 길을 걷는 것이다. 위험하고 미끄럽지만 그래도 걸을 것이다.
그러면서 살아온 삶의 무게를 줄이고,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내려간다는 마음으로 걷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올라온 눈길을 찾아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도 눈은 계속 내린다. 눈을 맞아 외투와 모자가 젖은 것 같고, 신발은 눈물 젖어 양말까지 축축하다. 다시 내일 온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려오니까 더 걷기 수월하다.
내일 힘든 눈길을 마음 정리하면서 걷는 것이다. 그리고 내려올 때는 한결 가벼운 마음이 되리라 기대해 본다. 어느덧 다시 엘찰텐 마을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