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을 여행하고 와서는 여러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마음은 조석으로 다르고 집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시간은 흘러 두 달이 어제인 것 같이 지났다. 그사이 추웠던 계절이 이제는 더워서 땀이 난다. 계절이 변해도 아직도 여전히 혼돈이다. 왜 사는지 생각도 해 봤고, 간혹 살고 싶은 마음이 없던 때도 있었다. 나이는 살아가야 할 의미를 알 수 있는 연륜인데, 아직도 아는 것이 없는 것 같다.
집에서 속 알이 하는 것보다, 밖으로 나오면 나을까 해서 집을 나섰다. 일단 낯선 곳을 걸어볼 생각이다. 걷고 싶은 마음조차도 없지만, 걷기 시작하면 예전의 걷던 근성이 나오리라 기대하면서 나왔다. 다시 귀찮으면 돌아갈 수도 있다. 그렇게 집 나올 생각도 어제 했었다.
일단은 늘 메고 다니던 배낭 중에 가장 작은 것으로 필요한 것만 넣었다.
계절에 맞게 몇 개의 옷과 가벼운 신발을 택했다. 그래도 나이가 요구하는 약들은 상당히 많다. 젊어서 나이 들면 어른들처럼 약을 많이 먹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먼저 산 어른들을 닮아가고 있었다.
짐은 아침에 일어나서 꾸렸다. 그 정도로 간단했다. 그리고 집안 정리도 어느 정도 하고서 배낭을 들었다.
버스를 집 앞에서 타야 하는데, 일단 배낭을 메니까 길 떠났던 기분이 돌아와 버스를 기다리지 않고 도로를 따라 걸었다. 마을에서 한참을 걸어 아랫동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오랜만에 나왔지만 여행 가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목적지는 예전부터 정해진 곳이 있지만, 그곳을 걷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일단은 몸이 무겁고 마음도 걷고 싶지 않다. 그냥 답답해서 일단 나온 것이다. 걷기 싫어 돌아갈 가능성 농후한 시작이다.
큰 동네 정류소에 내려서 대도시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정류소 안에 들어섰다.
정류소 안에는 표 파는 할머니가 손님도 귀찮아하는 얼굴이다. 시간을 물으니까 옆에 있는 시간표를 보라고 퉁명스럽게 말한다. 얼굴에는 나이도 많이 들었지만, 세상 살기 싫은 모습이다. 그냥 하기 싫은 것을 하라고 시켜 놓은 것 같고, 돈도 싫고 세상일이 모두 싫은 것 같다. 지금 정류소 할머니 마음이 나보다 더 세상이 싫은 것 같다. 그러니 나도 그냥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다. 여행 가는 기분이 하나도 들지 않는 버스를 타고 졸다가, 차창으로 스치는 풍경을 보기도 하다 보니 또 다른 환승지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기차를 타고 가는데, 버스에서 그렇게 생각 없이 졸면서 왔지만, 다시 조는 것은 아무 생각도 하기 싫은 것이다. 그러다가 반쯤 왔을 때, 이제 잘만큼 잤는지 정신이 든다. 정신이 드니까 또다시 나오는 것이 요즈음 고민들이다.
세상은 모두 제각각이다. 묘한 인연으로 만난 사람이 아직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신앙을 업으로 삼는 사람은 그 신앙을 널리 전파하고 넓히려는 것은 직업의식일 것이다. 그런 사람과 나의 마음은 같지 않다.
그런 사람이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자기가 생각하는 신앙으로 존경을 받는다. 존경을 넘어서 모든 사람을 지배하려고 한다. 본인들이 아마도 그런 처지를 스스로 자청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서로가 행복하다면 누가 탓할 필요는 없다. 요즈음 신앙은 자기들의 잔치에 더 많은 사람을 초대하고 싶은데 그것이 쉽지 않은 세태이다.
남의 이야기도 그렇게 유별나게 보이면 눈살이 찌푸려지는데, 나에게 그런 믿기 싫은 것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되니까 스트레스다. 스트레스를 넘어서 고통스러운 심정이다.
주변 신앙을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고, 피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피하면 따라다니니, 귀 막힐 일이다.
세상 억울한 마음에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은 것이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으로 억울하다고 생각은 소위 믿는 사람들에게는 외계인과 이야기하는 것 같다. 내 마음만 답답할 따름이다. 여기서 나는 스스로 정리해야 하는데, 아직은 그렇지 못했다. 답이 없는 문제는 덮어버리면 되는데, 살아온 세월이 그렇게 못해서 그렇게 답답하게 사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너무 기막힌 일을 겪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는 무슨 말을 해야 그 상황에 적합할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식구였던 사람이 내 편이 아닌 것이 안 좋은 상황이지만, 그런 마음은 서로 생각이 다르면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도 막상 내가 당하면 보통과 다른 고통이다. 그러나 살면서 그런 것을 겪는 것이 우리 삶인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인간은 언젠가는 배반한다. 단지 길고 짧을 따름이고, 때로는 이별할 때까지 그날이 오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네발 달리 짐승은 배반하지 않지만, 두 발 달린 짐승은 언젠가는 배반한다는 말이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이 요즈음 심정이다. 이렇게 어려운 일을 당하고 나서 길을 나선 것이다
그냥 나온 길에서 내가 아직 걸어야 할 길이 남아있는 곳으로 가고 있다. 그 길은 거창한 길이 아니라 예전에 걷다가 그만둔 트레킹 코스이다.
그 길을 걷지 않아도 누가 말하진 않는다. 지금 그 길을 걷고 싶을 때도 아니고, 걷고 싶지도 않지만 그래도 그냥 걷다가 남은 길이라 가보는 것이다.
혹시 이 길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고 평상심을 찾을 수 있을지 알 수는 없다. 그런데 걷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가는 그 길의 발걸음은 너무 무거울 것 같다. 그러면 중간에 돌아갈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 길에도 어떤 좋은 우연히 기다릴지도 모른다. 그냥 힘없이 멍청히 걸어보는 것이다. 원래 세상 일은 그런 것이다.
그냥 걸어 보다가 가기 싫으면 쉬고, 그래도 또 싫으면 돌아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걷은 길은 희망의 길이고, 희망을 찾아 걸어온 길이었다. 지금은 분명히 아니다.
그러나 일단 가보자, 별로 기대는 하지 않는다. 평소에 느끼지 못한 짜증 나는 길이 나를 기다릴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