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로 지내는 시간은 무심히 흐른다.
아침이 온 것 같은데, 저녁이다. 그리고 월요일이 어제 같은데, 마을 교회 종소리를 들으니 일요일 오전이라는 걸 알아차린다. 그래도 늘 버릇처럼 시간을 알차게 보내려고 애쓴다.
날이 밝아오는 시간이면 매일 조깅하는 것이 습관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리고 조용한 마무리를 준비해야 한다고 늘 생각한다.
그러다 옛 미련이 불쑥 나오는 경우는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러다가 곧 평상심으로 돌아간다.
그 미련이 나오는 순간은 누구에게 하소연하고 싶다. 어제는 딸에게 내 넋두리를 적어서 메일로 보냈다. 그러니 마음이 조금 차분해졌다.
예닮아, 읽어다오
아빠 마음이 갈아 앉는다. 무겁게 내려앉은 기분이 아무 말도 하기 싫다. 말없이 눈으로 보고 있지만, 머리에 닿지 않는 책을 펼치고 있다. 도서관 열람실은 아무도 없는 홀로다. 눈으로 글자를 보고, 머리는 다른 생각이다. 머리에 의미 없는 옛 상념들이 오간다.
그동안 그렇게 아쉬워하며, 잊으려고 했었다. 그리고 수천 Km를 걷고, 돌아보고, 놓아도 보고, 떨치려던 것들이 지금 다시 머릿속에 오락가락이다.
예전처럼 다시 아파하지는 않겠지만, 마음이 밑으로 내려앉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지난날의 아쉬움이 지금 또다시 생각난 것이다. 평소와 다른 행동은 하지 않지만, 마음은 평소와 같지 않다. 이제 곧 조용히 원래의 평상심으로 돌아갈 것이다.
오늘 아침, 아직 현직에 있는 옛 직장 후배에게 전화가 왔었다.
그간 안부 말이 오가고, 그 후배는 내가 듣기 싫은 이름을 거명했다. 신임 지역 청장으로 누가 내정되었는데, “혹시 아는 분이냐"라고 물었다. 그 말에 갑자기 옛 현직 때, 아쉬움이 확 올라왔다. 그 아쉬움에, 퇴직 후에는 뉴스도 안 보고 지내고 있다.
그 사람을 너무 잘 안다. 편법으로 진급을 여러 번 한, 능력이 출중한 후배였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못한 것의 질투심일 것이다. 내 자만심은 그런 후배보다 “내가 더 능력 있다"라고 생각 하는 것 같다. 패자는 말이 없는 것이 최선이다. 스스로 능력이 부족하다고 인정하던지, 아니면 관운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 인정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없는 것이다. 실제 모두 “내 탓인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이렇게 내려앉은 것은 아직도 그 현역 시절 아쉬움이 남은 것이다.
그런 미련과 집착을 내려놓으려고, 6천 Km나 걸었다. 걸으면서 잊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방법도 썼다.
그것은 잊으려고 하지 않고, 아쉬웠던 시간들을 다시 끄집어내었다. 그리고 그것을 여러 번 생각하고, 후회되는 것도 곱 씹었다. 잊으려 하니 망각이란, 시간은 오래 지나야 온다. 그래서 완전히 상처를 속까지 뒤집어서 아파했다. 혼자 걸으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가슴이 시원하도록 .....
상처가 완전히 들어내면, 새살이 돋아날 것이라는 마음에서 그랬다.
이 글을 예닮이에게 쓰면서 마음이 조금 후련해졌다.
누구에게 답답한 마음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지금 듣는 상대는 그렇게 심각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그래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리까지 갔으면서 “뭘 그렇게 욕심이냐”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거의 다 된다"고 생각한 것을 놓친, 내 마음을 이해 못 할 것이다.
사실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할 상대도 없다. 그리고 들어줄 사람이 없다. 그래서 딸에게 부질없는 넋두리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제는 많이 내려놓아서, 곧 평상심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지난 일이고, 감정조차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다.
세상이 내 맘대로 흘러가지 않고, 옛일은 더더욱 오래 생각할 일이 아니다. 아직 점심을 먹지 않았다. 먹고 싶은 마음이 없다. 주변에 수많은 책 중에서 마음에 닿는 제목을 선택할 것이다.
그 책을 펼쳐서 내가 읽고 싶은 내용이면 읽고, 아니면 또 다른 책들을 찾아 오랫동안 이 칸에서 저 칸으로 옮겨가며 찾을 것이다. 그러다 내 마음을 온통 빼앗아 갈 책을 만나면, 오늘은 한없이 기쁨 날이 되는 것이다.
예닮아, 아빠는 아직도 마음이 여린 것 같아. 지난 일에 마음 동해서 우울한 감정이 생기는 것을 보면.....
그래서 언제 또 걷는다고 떠날지, 낯선 곳을 여행할지 모르겠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잘 살아야 하는데, 아직도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 딸은 그런 아픔이나, 어떤 아픔도 없길 바라는 것이 아비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