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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오니다온 Nov 24. 2019

<영하의 바람>을 견뎌내는 모든 <거인>들

한국 독립영화 4

<영하의 바람>의 영하와 <거인>의 영재는 두 손을 모으고 신에게 기도를 한다.


그 조용한 의식 속엔 오로지 간절하게 붙잡은 두 손 밖에 없다. 눈치 없이 두 손의 틈새로 바람이 든다. 애써 쌓은 기도들이 훨훨 날아간다. 짧은 악수를 마치고 이별하는 두 손, 애써 힘을 주지만, 손에 남은 것은 공허뿐이다.


영하와 영재는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무엇도 하지 않았기에 무책임한 부모를 둔 고등학생이다. 책임을 회피하는 어른들은 아이에게 곧 재난과 같다. 영하의 엄마는 ‘삶은 혼자서 견뎌내는 것’이라는 말만 남긴 채 영하를 떠났고, 영재의 부모는 영재의 양육을 포기한 것도 모자라 동생마저 영재에게 떠넘기려 한다. 근본적으로 삶은 혼자 견뎌내야 하는 종류의 것이지만 삶의 무게는 모두에게 다르며, 개인이 버텨낼 수 있는 무게는 더 큰 폭으로 달라진다. 영하와 영재에게 주어진 삶은 필요 이상의 무게를 지닌 것이었고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마주한 세상은 영하의 바람(wind)만큼이나 차가운 것이었다.


그렇기에 영하와 영재는 소리 없이 운다. 청자가 없는 외침은 무의미하기에 그들은 소리를 내어 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얼굴의 굴곡대로 흘러내리는 눈물과 불가피한 침묵만이 그들의 현실을 지배한다. 빛에서 자랄 권리를 박탈당한 아이들에게는 유독 무거운 의무가 주어진다. 무기력하게 주저앉는 대신 스스로를 구원해서 빛에 세우는 일. 자신에게서 잘못을 찾는 대신 무책임한 부모를 원망하며, 스스로를 동정하는 대신 어떻게든 살아나가는 일. 대부분은 실패하고, 일부는 평생 동안 그 시절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영재는 도둑질을 하거나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는 것 외에는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자신을 지키기도 벅찬 환경에서 애초에 다른 방법을 찾을 여유 같은 것도 없었다. 스스로도 작은 몸으로 더 작은 동생을 지키기 위해 두 손을 맞잡고 신을 찾던, 혹은 찾는 척해야 했던 영재는 절망을 먹고 자라는 거인이 되어야 했다. 힘을 잔뜩 준 손이, 질끈 감아버린 눈이, 그게 그 아이의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다는 사실이 안쓰럽다.


영하의 바람(wish)은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는, 누군가에겐 아주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바람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당장 지낼 곳과 생활비를 마련해야 하는 영하에게 매력적인 선택지는 술집에서 일을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어릴 적 함께하던 미진은 망설이다가 결국 절망만이 남은 영하의 손을 잡는다. 영재가 그 시기를 홀로 견뎌내야 했던 것과 달리, 운 좋게도 영하에게는 미진의 체온이 주어졌다.


영하의 현실은 그대로 절망적이다. 그럼에도 존재만으로 영하의 바람이 부는 시기를 견뎌내게 해 주는 사람이 있다. 사람을 절벽 끝으로 몰아낸 것도 사람이지만, 사람을 구원하는 것도 사람이다. 불확실한 미래의 어느 시점에 주어질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보다 당장의 추위를 견디게 하는 체온이 하루를 살아내게 한다. 영하의 바람이 부는 겨울의 복판에서, 아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거인이 되어 서로를 지켜낸다. 어른들이 제 책임을 다하지 않아 생긴 인재(人災)를 견뎌내는 아이들은 아주 길고도 무거운 싸움을 해나가야 한다. 누가 이 아이들을 거인으로 만들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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