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기분이 좋을 때면 흔히 ‘하늘을 나는 기분’이라는 관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정작 하늘을 날고 있는 라이언은 비행에서 특별한 설렘을 느끼지 못한다. 삶의 대부분을 허공에서 보내는 라이언에게 비행은 그저 업무의 일환이며, 마일리지를 쌓기 위한 방도에 불과하다. 그의 개인적인 삶은 그의 직업과 닮아있다. 그는 결혼을 할 생각도, 아이를 가질 생각도 없으며 기존의 가족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 대신 그는 일 년에 삼백일에 가까운 시간 동안 출장을 다니는 삶을 택했다. 그런 라이언이 알렉스를 만나며 처음으로 ‘정착’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는 인간관계가 가방에서 가장 무거운 부분을 차지해 어깨를 속수무책으로 짓누른다고 하지만, 동시에 그 관계들이 그 무게를 견디게 해 준다는 것도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렉스의 가정을 목격한 라이언의 새로운 삶의 방향성은 금세 무너지고, 그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다시 비행을 시작한다.
지상에 발을 딛고 있지 않은 라이언의 삶은 가벼운가? 특히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모든 것을 포기해가는 사람이 늘어나는 이 시대에 누가 그 가벼움을 탓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딘가에 도착했다고 느끼기엔 역부족인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늘 허공 어디쯤에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라이언처럼 다시 길을 떠나야 한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가방을 완전히 태우는 대신 적절한 무게를 유지해가면서 말이다. 그러다 보면 가끔은 넘어질 것이다. 예측할 수 없음은 삶의 일차적 특성이기 때문이다. 정착을 꿈꾸게 했던 알렉스를 잃은 순간 그토록 염원하던 천만 마일의 마일리지를 채우는 것처럼 삶은 때로 누군가의 장난 같다. 한 곳에 정착해서 살아가든 자유롭게 세계를 떠돌며 살아가든 삶은 그저 흘러가며 그 안에는 각자의 좌절과 기쁨의 순간들이 공존한다. 그러한 변화들을 본인의 방식으로 마주한다면, 그 모든 삶은 보통 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로 존재할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라이언은 예기치 못하게 변화를 마주해야 하는 사람들 -자신이 해고하는 사람들- 의 최소한의 존엄을 지켜주고자 분투한다. 그는 화상 통화의 방식으로 누군가를 해고하자는 나탈리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다. 인생에서 예기치 못한 변화를 마주할 때 필요한 것은 안내집이나 나탈리가 구상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진심 어린 존중과 이해, 배려와 조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가벼움을 표상하지만 자신만의 뚜렷한 철학을 가진 사람이다. 길을 잃고 허공을 헤매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가 원하는 순간 스스로 땅에 굳건히 두 발을 딛고 설 수 있게 해 준 것은 바로 그 자신이 지켜온 철학의 무게일 것이다.
다시, 우리는 공중을 걷고 있다. 등 뒤의 가방이 너무 무거울 때면 자신을 붙들어 줄 누군가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내가 진 가방의 무게를 감내해야 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다. 부유하는 삶이어도 괜찮다. 내가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철학, 존중받고 싶은 만큼 타인을 존중하려는 노력, 그 어느 삶도 함부로 가볍게 여기지 않는 신중함으로 삶의 순간들을 묵묵히 걷다 보면 자신이 원하는 때에 안전하게 땅 위에 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마음껏 허공을 누비는 삶을 살아도 괜찮다. 다시 길을 떠나는 라이언처럼, 영화의 시작과 끝을 통틀어 구름 위를 날고 있는 라이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