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독립영화 5
한 생애에 발화(發話)되지 못한 채 가라앉는 말은 어느 정도일까?
발화되지 못한 말들은 사람의 가슴에 남아 감정이라는 형체로 굳어지고, 그 무게는 사람을 짓눌러 아무것도 참을 수 없는 순간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대상에게 전달할 수는 없지만 명백히 그곳에 존재하는 감정. 폭발 대신 하강을 택해 심해로 침몰하는 감정. 나는 그럴 때면 편지를 쓴다. 수신인이 부재해도 편지는 쓸 수 있으니까, 나는 그렇게 나에게만 속하는 감정들을 기록하고 축적한다.
<윤희에게>의 쥰도 감정이 쌓이고 쌓여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순간이 되면 편지를 썼다. 윤희에게, 로 시작하지만 절대 윤희에게 닿지 않을 편지는 그 자체로 모순적이다. 그 편지는 우연에 기대어 ‘사람을 조금 외롭게 하는’ 혹은 ‘외로워 보이는’ 윤희에게 전해진다. 젊은 날의 사랑이 몰이해로 짓밟힌 후 윤희는 자신에게 주어진 여분의 삶을 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여분의 삶 중 어느 날, 윤희는 딸 새봄과 함께 쥰이 살고 있는 오타루로 향한다. 눈과 달, 밤과 고요만이 가득한 겨울의 한복판에서 둘은 우연처럼, 혹은 필연으로 재회한다. 윤희와 쥰이 걸어온 길은 눈이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겨울이었다. 그치지 않고 쌓여가는 눈을 우두커니 맞는 것 외에는 살아갈 방법을 몰랐던 윤희는 가혹한 계절을 온몸으로 지나왔다.
윤희는 바깥과 자신의 시차를 어떻게 견뎌왔을까? 바깥의 계절은 시시각각 바뀌는데 자신은 언제나 겨울을 살면서, 봄을, 여름을, 또 가을을 살아가는 타인들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텅 비어 버린 속을 채우기에 담배 연기는 아주 쉬운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쥰의 편지를 받은 지금, 윤희는 다른 방법을 직시한다. 필연적으로 발신인과 수신인의 시차를 내포하는 편지가 바로 그것이다. 쥰의 편지가 윤희에게 닿았을 때 그 편지는 쥰과 윤희가 함께 있는 과거와 그렇지 못한 현재를, 그 영겁의 시차를 뛰어넘게 하는 용기가 되었다. 같은 마음으로 겨울을 걸어온 쥰의 존재를 목격하고 나서야 윤희는 답장을 쓰고, 오타루로 여행을 떠난다.
이제 윤희는 겨울 내내 멋대로 당신의 꿈을 꾸었다고 고백한다. 윤희의 여생은 더 이상 벌이 아니고, 쥰의 꿈을 꾸는 자신이 부끄럽지 않다. 혹독한 겨울의 끝에서 다음 계절로 발을 내딛는 시점에서 윤희는 온몸에 휘두르고 있던 외로움을 벗어던질 준비를 한다. 누군가를 외롭게 하는 일도, 스스로를 외롭게 하는 일도, 겨울이라는 계절을 그저 견디며 살아내는 일도 그만 둘 준비가 되었다.
그치지 않을 것 같던 오타루의 눈이 그쳤다. 수신인과 발신인이 모두 존재하는 편지는 하나의 발화(發話)로 변모한다. 발화된 감정은 해소되고, 둘의 관계는 새로운 시작점에 놓였다.
새봄, 바야흐로 발화(發花)의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