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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오니다온 Apr 24. 2020

<아사코>, 사랑의 시옷과 이응


사 – 랑 
뾰족한 시옷으로 시작해 둥근 이응으로 끝나는, 온통 모나고 가장 둥근 글자.


사랑의 속성을 대변하기에 ‘사랑’이라는 단어만큼 적합한 글자는 없다. 사랑은 늘 양가적이다. 달콤하지만 날카롭고, 단단한 듯싶지만 아주 작은 틈에도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연약함으로 존재한다. 영원하다고 믿고 싶지만 예상치 못한 순간에 멋대로 변해 버리고, 때론 추악하지만 때론 황홀하게 아름답다. 당신을 온전히 이해하고 싶으나, 기껏해야 당신의 불가해함을 인정하는 것이 최선이다.


사랑은 방심한 순간 사고처럼 닥쳐오기도 한다. 아사코와 바쿠는 폭죽이 터지는 찰나 눈이 마주치고, 한마디 말도 없이 키스를 하고 운명의 대상임을 확신한다. 폭죽이 터지는 건 순간이어도 그 길을 따라 남은 자국은 연기로 흩어지기까지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지만, 바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아사코는 절대 바쿠를 이해할 수 없다. 존재의 상실은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기에, 또 하필 그 존재가 사랑이라는 거대한 감정의 대상이었기에 이 사건은 아사코에게 트라우마가 된다. 영화에서는 순식간에 2년이 지나고, 아사코는 오사카가 아닌 도쿄에 있다. 트라우마를 회피해야만 아사코의 현실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아사코에게 료헤이의 등장은 트리거가 되어 애써 외면하던 트라우마가 아사코를 생생하게 덮쳤다. 그 압도적인 불안과 공포 앞에서 아사코는 료헤이에게 ‘더 이상 못 보겠’ 다며 또다시 도망을 택한다.



공교롭게도 아사코가 료헤이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날은 대지진의 날이었다. 폭죽만큼이나 강렬한 자극 앞에서 또 다른 결심이 섰는지도 모른다. 아사코는 료헤이를 처음 만난 순간 불가항력적으로 외모가 유사한 바쿠를 떠올리지만, 5년이 지난 시점에서는 명백하게 ‘료헤이가 좋다’는 자신의 감정을 확신한다. 하필 그 시점에 아사코 앞에 나타난 바쿠는 또 다른 사고였다. 트라우마는 그렇게 압도적인 것이다. 먼 과거처럼 흐릿하게 느껴지다가도 트리거를 만나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생생하게 재현된다. 그 재현 앞에서 이성적인 판단은 불가능하고, 오직 무의식만이 남아 행동을 지배한다. 바쿠의 손을 잡고 료헤이를 등지는 아사코의 선택을 우리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다.


차 안에서 아사코는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이 긴 꿈처럼 느껴’ 진다며 ‘성장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한다. 아사코가 언급하는 ‘성장’은 트라우마에서 벗어난(혹은 벗어났다고 생각했던) 자신, 즉 사라진 바쿠의 흔적을 좇는 대신 료헤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자신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아사코는 결국 ‘눈을 떠보니 전혀 변한 게 없’ 다며 눈을 감아 버린다.



여기서 아사코는 ‘꿈’과 ‘눈을 뜬 순간’을 착각하고 있다. 트라우마가 너무 거대하게 다가와서, 일상으로 자리 잡은 료헤이와의 모든 순간을 꿈으로 치부해버리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바쿠의 차 안에서 잠을 자고 나서야 바쿠와의 시간이 ‘꿈’이며 료헤이와의 시간이 ‘눈을 뜬 순간’이었음을 깨닫게 된 아사코는 힘껏 달린다. 늘 누군가가 운전하는 차에 몸을 싣고 있던 아사코가 두 발로 뛰어간다. 속도는 느릴지언정 자신의 의지로 돈을 빌리고, 오래된 친구를 찾아가고, 사랑하는 료헤이의 집을 두드린다. 용서받을 수 없는 걸 알기에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하면서도 옆에 있고 싶다고, 그렇지만 더는 기대기만 하지는 않겠다고 용감하게 선언한다. 아사코가 꿈같던 바쿠에게 오랫동안 매여 있던 이유는 그와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이별은 일방적이고 그 이유를 알 수도 없다. 그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다 보면 남는 것은 작아진 자신뿐이다. 당시의 아사코는 ‘반드시 돌아올게’라는 바쿠의 말을 동아줄처럼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것 때문에 료헤이와 지내는 시간에 불안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야말로 오롯이 나의 의지로 안녕. 아사코는 이제야 제대로 된 이별을 하고,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트라우마를 마침내 극복해낸다.



불행하게도 아사코가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 일련의 사건들이 사랑의 대상인 료헤이에게 닿아 트라우마가 된다. 피 흘리는 몸은 없었지만 무너지는 마음이 있었고, 아사코는 누구보다 그 무너지는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료헤이는 돌아온 아사코에게 평생 너를 믿지 못할 거라고 이야기한다. 그래도 어떡해. 못 믿겠는데도 비를 맞으면서 뛰어다니는 너를 보기 힘들어서 문틈 사이로 진탄을 내어주고 싶은 안쓰러운 마음을 어떡해. 젖은 몸을 닦을 수건을 던져주고 싶은데 어떡해. 더 이상 너를 믿을 힘이 남아 있지 않은데도 너랑 살아가고 싶은데 어떡해. 사랑 앞에 선 인간만큼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는 없다. 연약해서 끔찍하고 안쓰러운, 동시에 소중하고 선연한 마음이다.


영화의 대사처럼 형태가 있는 것은 깨지기 마련이다. 아사코와 료헤이의 사랑은 깨짐으로써 실재함을 증명해낸다. 앞으로 그들의 사랑에는 늘상 불안이 공존할 것이다. 료헤이가 트라우마의 그늘에서 벗어나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아주 짧을 수도, 혹은 평생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아사코에게 있다. 그동안 아사코는 온 힘을 다해 료헤이를 소중히 여겨줄 것이다. 에이코의 말처럼 아사코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실의 불안을 끌어안고도 함께 살아보기로 용기를 냈을 때, 그들은 더러운 동시에 아름다운 강이 내다 보이는 집에서 보다 단단한 사랑의 실체를 목격할지도 모른다.



다시, 사-랑이라는 단어는 단 사탕처럼 때로는 황홀하고 때로는 날카롭다. 깨진 사탕에도 입 안을 베이는 연약함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사랑에라고 베이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영원한 사랑 같은 걸 믿을 수도 없고 너에게 섣불리 약속할 수도 없지만, 아주 먼 미래에도 내게 사랑의 형태는 너를 닮아 있을 것이다. 지금은 시옷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온몸을 찌르지만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이응에 가까운 둥근 모양의 사랑을 손 위에서 도록도록 굴리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삶의 허공에 애처롭게 매달린 채 이응을 향해 달려가는 모든 순간을 ‘사-랑’으로 명명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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