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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오니다온 Jun 04. 2020

<톰보이>, 처음 만나는 자유

나는 세상의 모든 이분법이 폭력적이라고 믿는다.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낯선 사람을 빠르게 판단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 외면으로 명백히 드러나기에 종종 성별은 가장 신속한 판단의 기준으로 사용되곤 한다. 그렇기에 미국에서 비행기 티켓을 예매할 때 성별 선택란에 남성, 여성 외에 ‘기타 성별’이 지정되어 있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여태껏 이분법의 편리성에 기대어 ‘기타’ 같은 것은 용인되지 않는 사회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편리함을 누리기 위해 우리는 너무도 많은 침묵을 강요하거나, 혹은 강요당해왔다. 하다못해 프랑스 문화권의 영화를 보면서도 ‘미카엘’이 일반적인 여자 아이의 이름이 아님을 쉽게 알아챌 수 있으니 말이다.



 <톰보이>의 로레는 모두에 의해 암묵적으로 동의된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다. 아마도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아이들과 함께 축구를 할 수 없었던 경험이 있는 로레는, 이사 온 동네에서 스스로를 미카엘로 소개한다. 로레는 짧은 머리와 웃통을 벗어던지는 행위만으로도 또래 집단에게서 금세 남성성을 부여받는다. 2차 성징이 시작되기 이전의 몸은 남성과 여성을 구분 짓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로레의 행동들이 사회에서 '여성'에게 금기시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밖에서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는 로레는 ‘여성스럽지 못하다’고 재단되고, 그래서 로레는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미카엘이라는 가면을 부여한다.



 반면 로레의 동생 잔은 사회가 기대하는 전형적인 ‘여자 아이’의 모습이다. 곱슬거리는 긴 머리를 빗어 내리고 발레를 하며, 분홍색 옷과 인형 놀이를 좋아한다. 그러나 잔은 로레가 미카엘이 되는 것에 대해 어떠한 의문도 품지 않는다. 로레가 원한다면 오빠라는 호칭 정도는 대수롭지 않다. 잔에게 있어 로레가 언니인가 오빠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과 재미있게 놀아주고 괴롭힘을 당할 때면 자신을 지켜주는 든든한 로레. 잔은 일관되게 로레의 본질을 응시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잔이 하나의 망설임 없이 로레를 긍정할 수 있는 이유가 잔이 사회적인 관념을 습득하기 이전이기 때문임을 안다. 젠더에 대한 개념이 부재한 상태에서, 잔은 로레에게 든든한 동생일지언정 우리의 이상(理想)이 될 수는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젠더 관념이 공고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회적 학습을 마친 ‘보통’의 어른이라면 로레의 거짓말을 그대로 긍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 아이가 ‘평범’하게, 그러니까 여자로 태어났다면 그 사실에 의문을 품지 않고 여자'답게' 자라기를 바랄 것이다.


“너에게 벌을 주거나 가르치려는 게 아니야.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말해줄래? 난 정말 모르겠거든” 


 로레의 엄마 역시 로레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지는 못한다. 자신의 행동이 로레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르지만 로레를 사회에, 그러니까 개학을 하고 학교에 가서 ‘로레’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하는 그 상황에 편입시키기 위해 자신이 생각하는 최선을 행한다. 그것은 이전 세대의 최선일지도 모른다.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혹은 그러기를 강요당하면서- 살아온 세대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 이분법의 피해자인 동시에, 그것을 공고히 해 온 자들이 우리의 이전 세대이다. 이해는 할 수 있지만 그들 또한 우리의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로레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로레의 친구 리사는 ‘미카엘’이었던 로레에게 ‘너는 조금 다른 것 같’ 다며 호감을 표했다. 미카엘이 로레였음을 안 후에 리사는 여자랑 입을 맞춘 것에 대한 일시적인 혐오감을 표출하지만, 이내 로레에게 돌아온다. 그리고는 화가 덜 풀린 표정으로 로레의 진짜 이름을 묻는다. 로레, 하는 대답에 둘은 눈을 맞추고 슬며시 웃는다. 이제 리사에게 로레가 소녀인지 소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로레의 진짜 이름, 즉 진정한 로레가 궁금할 뿐이다. 이 짧은 대화를 하기까지 로레도 리사도 많은 용기를 내야 했을 것이다. 여성과 남성, 그 폭력적인 이분법에서 벗어나 너의 이름을 묻는 순간. 아, 어쩌면 로레에게 그 질문은 처음 만나는 자유의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로레는 미카엘이 아닌 ‘로레’로 살아 나가야 한다. 축구를 하기 위해 남자가 되는 대신, 여자가 축구를 하는 것이 더 이상 이상하지 않은 세상을 위해 싸워야 한다. 다행히도 로레에겐 눈을 맞추고 이름을 묻는 리사 같은 친구와, 내 취향과 행동을 의문 없이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잔 같은 동생이 있다. 그리고 여기, 영화 밖의 세상에서 폭력적인 파란색 원피스에 저항하는 우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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