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필 무렵"에는 옹산 골목시장를 주름잡는 옹벤져스가 있다.
내가 사는 도화동 골목길에는 나의 화를 불러일으키는 3명의 화(火)벤져스가 있다.
아이와 식빵을 사러 나간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층이 하필 8층이다. 싸늘하다.
8층에는 우리 딸 어린이집 친구네가 사는 집으로 일하는 며느리 대신 4살 된 쌍둥이 남매를 돌봐주시는 성격이 태양초 땡초보다 매운 할머니가 산다.
할머니가 탔을까. 안 탔을까. 탔을까.
7층. 6층. 5층... 그리고 4층.
사랑일까 아닐까 나뭇잎 떼던 마음으로 하염없이 떨어지는 숫자를 본다.
드디어 4층이다.
"어머 애기 엄마네"
항상 불안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우리 동네 화벤져스 1호다.
"네 할머니 안녕하세요~ 어디 가시나 봐요"
"응 잠깐 시장에. 애기가 이렇게 많이 컸어? 동생 안 낳아? 얼릉 낳아야지.
애 하나면 나중에 애가 외로워서 안돼. 어디 의지할 때도 없고 아이고 딱해라. 그때 엄마 원망하면 어떡하려고. "
"그러게요. 그런데.."
"내 말 믿고 꼭 낳아봐. 둘째 꼭 낳으라니까.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어."
할머니가 거의 70은 되셨다던데 폐활량도 좋으신지 속사포로 랩을 쏟아내신다. 딱딱 떨어지는 라임이나 쪼개는 박자감으로 봐서는 쇼미 더 머니 가셔도 바로 목걸이 받으실 기세다.
쇼미더 할머니를 뒤로하고 우리 동네 가장 핫한 야채천냥 앞을 지난다. 10평 남짓한 가게에 일하는 아주머니만 족히 8명은 되는 돈 먹고 돈 먹기 현금 장사만 하는 아주 알짜배기 가게다. 돈 5천 원만 들고 가면 다이소 저리 가라 급 야채 FLEX를 누리고 올 수 있는 곳으로 항상 동네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어머 애기 엄마네"
가려던 뒤통수를 잡아끌고 내리꽂는 저 목소리. 우리 동네 화벤져스 2호 야채천냥 사장님이다.
"네 사장님 안녕하세요"
"오늘은 집에서 밥 안 해 먹나 봐 아무것도 안 사가네. 애기가 몇 살이지?
"이제 4살이에요"
"동생 낳을 때네. 엄마한테 얼릉 동생 낳아주세요. 해. 지금 낳아도 5살 터울인데 어쩌려고 그래.
딱 보니 남동생 낳게 생겼네 딱 보면 알지 하는 행동이 딱 누나야 누나"
야채천냥 사장님은 부채만 안 들었지 거의 작두 타기 직전이다. 왕꽃선녀님과 오래 있어봐야 탈탈 털리는 일 밖에 없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다.
그렇게 왕꽃선녀님을 지나 김우물 슈퍼 앞을 지난다슈퍼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그 슈퍼는 조선시대 짚신 신던 시절 우물이 있던 자리에 터를 잡고 지은 가게이다. 3대째 대대로 내려오는 슈퍼로 우리 동네에서 1L 서울우유가 제일 싼 집이다. 3분 거리에 있는 롯데마트보다는 무려 250원이 싸다. 250원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김우물로 들어간다.
"애기 엄마 오랜만이네"
보통 아들이 가게를 보는데 오늘은 그 아들의 엄마가 앉아 있다. 바로 화벤져스 3호 박우물 2대 며느리다.
"어떻게 오늘 가게에 다 나오셨네요"
"세상에 이 이쁜 애기 이름이 뭐니? 아이고 대답도 똑 부러지게 하는 거 봐라.
동생 생기면 동생도 잘 돌봐주겠어. 새댁 얼릉 둘째 낳아야지"
"아.. 동생.."
"첫째가 똑똑하면 둘째는 뭐 말할 것도 없지. 그리고 둘째는 자기가 알아서 커. 일단 늦기 전에 얼릉 애부터 만들어"
영재 발굴단 소속인 박우물 사장님 덕에 이름 석자 말한 내 딸은 최고 똑순이가 되었다. 250원 값을 톡톡히 치르고 도망치듯이 박우물을 빠져나온다.
둘째 권하는 화벤져스의 폭격을 뚫고 식빵 한 봉지와 서울우유를 들고 사지가 너덜너덜해져서 집으로 돌아온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하루 종일 떠든 사람처럼 입이 아프다.
고작 5분도 안 되는 골목을 걸었는데 20박 21일 국토대장정 한 것처럼 삭신이 쑤신다.
이제 막 식빵 하나를 입에 넣으려는 찰나, 딸이 말한다.
엄마, 나도 동생 있었으면 좋겠어
엄마가 동생만 낳아줘.
키우는 건 내가 키울게
이게 다 식빵 때문이다. 이제 식빵도 쿠팡맨에게 부탁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