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달픈 인생, 병약한 직장인의 아르헨티나에 머리드밀기 - 출발 전
연중 내내 미뤄오다 겨우 끝낸 건강진단에서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 감염 소견서를 받았다. 빈 손으로 온 내 인생에 균들만은 은밀하게 나와 함께 해줬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십이지장 궤양을 선사한 이 균들을 죽이는 항생제를 삼키며 앞으로 내 짧고 가련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더 낡아갈 관절들과, 보수적으로 변해가는 정신과, 상승해 갈 해수면과, 녹아없어질 빙하들. 이 모든것을 견주어 봤을 때 한 줌 젊은 에너지라도 지녔을 때 앞으로는 볼 수 없을 아주 먼 곳으로 여행을 해야하지 않을까? 한량기질이 나를 충동질했다.
그리하여 부주상골 증후군으로 남들보다 쉽게 발목 염좌를 얻고야 마는 내가,
만성 근육 부족으로 13층 사무실까지도 걸어올라가지 못하는 내가,
돌산을 걷고, 빙하를 걷고, 걷다가 요단강까지 건널 것만 같은 아르헨티나 여행을 결정해버린 것이다.
여행은 비행기표를 사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사면 가는거다. 스카이스캐너로 최저가 티켓을 구매하는 소비자에게 환불은 사치다. 결제버튼을 누르는 순간까지 쿠바의 아바나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두 도착지 사이에서 번민했다. 금융위기의 아르헨티나의 저렴한 티켓값이 쿠바의 스노쿨링과 올드카 투어를 압도했다. 체게바라 정신은 마흔에 즐기기로 하고 부에노스 행을 선택했다. 어찌됐든 그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지 않았는가.
오랜만의 장기여행이었다. 일 년에 보름이 채 되지 않는 휴일만이 허락된 내가 (주말 포함) 17박 하고도 18일의 휴가를 냈다는 것은 11개월간 단 5일만을 쉬고 일했다는 뜻이다. 이 날을 위해 소처럼 일해온 날들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탱고와 와인, 이과수라는 단어가 주는 이국적인 낭만에 마비되어 있었다. 남미라는 단어가 주는 습하고 기묘한 향수때문이었다. 행복하다면 이방인이 머물다 가는 쪽방에서 장국영과 양조위처럼 춤도 추리라. 이과수는 타히티처럼 더울것이다. 자켓은 필요없겠지. 민소매와 반바지만 배낭에 넣어 훌쩍 떠날 생각이었다. 한 나라에 여러 기후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다. 수면양말과 경량패딩으로 캐리어가 가득 찰 한치 앞날을 보지 못하고, 이 세상에 내 예상대로 되는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삼십 년동안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긴 시간을 견뎌야 한다. 노동자가 겪는 고통에는 장시간 저임금 노동만이 있는게 아니다.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없는 프롤레타리아는 원치 않는 긴 비행시간과 경유대기 시간도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마이너스 통장의 마이너스 금액 부분을 헤아려 보다가 왕복 65시간 10분의 비행시간을 견뎌내기로 한다. 어차피 직행 비행기는 없었고 경유 횟수가 짧다고 빨리 도착하는것도 아니였다. 10시간을 공항에서 대기할 바에 비행기에 한번 더 탔다가 내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동네 뒷산도 오르지 않는 허약한 노동자가 올랐던 돌산들과 닳은 연골들의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다.
아르헨티나와 파타고니아에서 하고싶었던 것들
1.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착해서 커피마시기, 탱고보기
2. 피츠로이에서 불타는 아침 돌산 오르기
3. 토레스 델 파이네 둘러보고 돌산 오르기
4. 빙하 위에서 무릎 연골 갈아보기
5. 세상의 끝에 슬픔을 두고 오기
6. 독점 투어회사를 통해 펭귄보기
7. 이과수 폭포에서 양조위가 되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