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쉽고 나는 건강해서-아르헨티나(2)

고달픈 인생, 병약한 직장인의 아르헨티나에 머리드밀기 - 출발

by 클렁커



낭패였다.


밀림에서 폭포를 맞고, 살롱에서 탱고를 배우며 유유자적하게 두 주를 보내려던 계획이었다. 거대한 나라에 대한 무지에서였다. 서점에서 겨우 뒤져 찾은 남미 여행 가이드북에서 만난 아르헨티나는 아주 초면이었다.


난생처음 파타고니아가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거치는 광활한 지대임을 알았다. 막연히 남쪽 어디엔가 있겠지 했던 거인의 나라 파타곤에 갈 수 있다니. 지구 반대편에 간 김에 그냥 지나 칠 수 없을 만큼 생경한 곳이었다. 이 길쭉한 나라에서는 남극으로 가지 않고도 빙하 위를 걸어 볼 수도, 펭귄을 볼 수도 있었다.


갈 곳은 많고 시간은 없었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할 수 있는 모든 스케쥴을 욱여넣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동아시아의 민족답게 빙하와 트레킹을 위한 엘 칼라파테, 남극으로의 관문 우수아이아, 지구의 허파 이과수에서 다시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아르헨티나 내에서만 (경유를 포함한)네 번의 비행을 해야 하는 아주 뚱뚱한 스케쥴표를 완성했다. 칠레와 브라질을 오가는 욕심 많은 하드코어 일정이었다.


스케쥴을 말 그대로 '짜내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쌍의 무릎 보호대와 발목 보호대를 주문했다. 칠레의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에서는 텐트에서 지내야 했으므로 핫팩도 되는대로 캐리어에 밀어넣었다. 새벽에 체온을 유지해 줄 조난용 금박 담요, 몽골에서 사용하고는 다시 쓸 일 없다고 생각했던 헤드랜턴을 챙기며 스스로에게 질렸다.


또 이렇게 돼버렸다. 휴식을 위한 여행을 하려고 여행지를 정하고 나면 종래에는 정글의 법칙이 되어버린다. 짧은 시간에 최대한의 경험을 하려는 근검절약의 정신이 뼛속까지 박힌 탓일까. 나는 여행지에서 이른 시간부터 움직였고 밤늦게 돌아왔다. 나와 같은 많은 이들이 그렇듯 동행이 있는 여행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나는 척박한 환경을 너무 잘 견뎠다. 위생관념도 희미했다. 머리만 대면 어디서든 잘 수 있었다. 동행에게 맞춘다면 내가 불만족스러운 여행이 될 것이고, 나에게 맞춘다면 그들을 학대하는 일정이 될 것이다.


옷은 최소한으로 챙겼다. 낡은 옷을 버리며 짐을 줄일 예정이었다. 생존용품으로 가득 찬 기내용 캐리어와 백팩 하나, 남미로 가면서 다운 패딩을 챙겨 입는 게 웃겼다.





발 끝에서 지각 맨틀 외핵 내핵을 파 들어가고, 온 길을 돌아가지 않고 계속 외핵 맨틀 지각을 순서대로 파헤쳐 간다면 12,742km의 여정을 거쳐 우루과이가 나올 것이다. 대류권과 성층권 사이를 안락하게 날아간다면 19,000km쯤을 지나야 아르헨티나에 도착한다.


프랑크푸르트 공항


착륙 전 버드아이뷰는 공항이 위치한 국가나 도시의 단면을 엿보게 해 준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유명한 독일인의 질서 정연함을 볼 수 있었다. 당연하게 줄지어가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마저 괜히 각을 맞춰가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보다 크게 느껴지는 것은 피로였다. 인천공항에서 발권할 때 항공사 직원이 내 여정을 응원해 주었다. 인천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상파울로로,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34시간 동안 두 번의 경유를 거쳐서야 아르헨티나에 도착할 수 있다. 출발한 지 열두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유럽이었다. 문득 그냥 이대로 입국해서 독일 여행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유혹마저 들었다.


브라질의 상파울루에 도착했을 때는 중간 좌석에 끼어서 12시간을 날아온 탓에 정신을 놓기 직전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중환자였다. 랩몬스터가 삼성 제품을 홍보하는 광고판이 너무 크게 있어 여기가 인천인지 잠시 헷갈리기까지 했다.


Ministro Pistarini 국제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길


한국의 겨울은 춥고 매캐했다. 좋은 공기를 뜻하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하늘은 이름에 걸맞게 쾌청했다. 날은 적당히 따스했고 바람은 차가웠다. 움직이기 둔한 두꺼운 점퍼를 벗었다. 돈을 주고서라도 보고 싶었던 푸르름이었다.


셔틀버스를 미리 예매한 덕분에 공항에서 시내까지 편하게 갈 수 있었다. 미리 예약해둔 호텔에 도착했을 때서야 비로소 내가 아르헨티나에 도착했구나, 실감이 났다. 저렴한 호텔이었다. 히치콕 감성을 풍기는 고전적인 복도와 색채들. 스릴러 같은 조명, 눅눅하고 낡은 공기에 가슴이 설레었다.



객실의 방문을 열었을 때는 참을 수 없이 가슴이 뛰었다. 고단한 여정 끝에 겨우 여인숙에 여장을 푼 이민자가 된 심정이었다. 한낮의 햇살이 낡은 침구 위로 아리게 내렸고,


오래 긴장한 몸이 수상한 침대 속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