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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레저 여행가 Jul 31. 2023

좀 있어 보이는 취미를 찾는 분들께

클래식 음악 들으며 와인 마시기

특별할 것 없었던 어느 평일. 그냥 하루 쉬고 싶어서 회사에 연차를 내고 집에서 뒹굴거리던 날이었습니다. 백수가 과로사하는 거라며 항상 바쁘던 아내도 그날은 집에서 함께 뭉기적 거리고 있었습니다.


살짝 늦은 점심. 뭐 먹을까 냉장고를 열고 잠시 고민을 하다가, 지난주에 마트에서 장 보면서 사온 냉동 피자를 꺼내서 오븐에 넣었습니다. 어차피 저녁때 어디 나갈 것도 아니고 해서 역시 마트에서 세일 하길래 만원 남짓 주고 들고 온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서 생산된 레드 와인도 한병 오픈했습니다. 오디오에는 낮에 마시는 와인에 어울릴법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Vienna Philharmonic Orchestra)를 지휘하고, 프리드리히 굴다(Friedrich Gulda)가 피아노를 연주한 앨범입니다. 점심 차리는데 든 돈은 약 2만 원.


평일날 휴가 내고 집에서 아내와 단둘이 먹는 점심, 와인잔을 들어 건배를 합니다.

"건강 챙기고, 돈 열심히 벌자!"

라는 건배사와 함께요. 피자를 한 조각씩 들어서 먹기 시작했는데 딩동~ 현관벨이 울립니다.


"누구세요?"

인터폰 화면에는 유니폼을 입으신 아주머니 한분이 작은 장비를 가지고 계신 것이 보였습니다.

"가스 점검하러 왔습니다."


현관문을 들어오시던 아주머니께서 저를 보더니 갑자기 뭔가 잘못되었다는 듯 당황하십니다. '지금 내가 뭘 안 입고 있나?' 저도 화들짝 놀라 급히 확인해 봤지만 다행히 입어야 할 건 다 입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께서 너무 미안하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날이신 것 같은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얼른 점검하고 가겠습니다."

'응? 좋은 날? 뜬금없이 무슨 말씀이시지?'

"아.. 아닙니다. 천천히 점검하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아주머니께서는 전광석화 같은 솜씨로 여기저기 점검을 하시더니 저희 집을 나서면서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방해해서 너무 미안합니다. 두 분 좋은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아주머니가 가시고 나서 아내와 식사를 이어갔습니다.

"아주머니가 갑자기 왜 그러셨지?"

"아무래도 우리가 클래식 음악 틀어놓고 와인 마시고 있는 게... 뭔가 기념일을 축하하는 것처럼 보인 것 같은데?"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아~ 오늘이 무슨 날이라 와인 마시며 한껏 분위기 잡고 있는 중에 들어오신 걸로 생각하셨나 보구나."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희가 마신 와인은 고급이라고는 할 수 없는 만 원대 데일리 와인이었고, 식탁 위의 음식은 냉동피자 였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과 어우러지면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무언가를 기념하는 근사한 식사 같아 보이게 했던 것입니다.


사실 클래식 음악과 와인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음악이라는 게 내가 좋아서 들으면 되는 것이고 술이라는 게 내입에 맞는 것을 마시면 되는 건데, 이 간단한 행동이 클래식 음악과 와인에 대해서는 왠지 선뜻 다가서기 어려운 거리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토벤 교향곡 제5번 다단조 작품번호 67 (Beethoven Symphony No.5 in c minor, Op. 67)*은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빈필하모닉을 지휘한 1975년 녹음이 최고지." 또는 "오늘 식사 메뉴에는 프랑스 보르도 포이악 마을의 카베르네 쇼비뇽과 멜럿이 블렌딩 된 레드 와인이 어울리겠어."와 같은 말을 하면 뭔가 되게 있어 보인다는 거죠.


(* Beethoven Symphony No.5 in c minor, Op. 67은 누구나 들으면 아실 빰빰빠 밤~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입니다.)


사실 클래식 음악과 와인이라는 것이 다가가기 어렵다는 게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그렇다고 이게 생각처럼 어렵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클래식 음악이나 와인관련하여 입문 서적도 상당히 많이 출간되어 있고, 인터넷이나 유튜브에서도 관련 정보들은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얼마간의 공부와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조급해말고 편안하게 즐기며 내공을 천천히 쌓고 나면 이만큼 적은 돈으로 가성비 나는 취미도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수백만 원 들여서 독일 베를린으로 날아가 베를린 필하모니 홀에서 베를린 필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는다면 황홀하겠지만,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국내 오케스트라 연주회의 만 원짜리 C석 티켓으로도 음악을 충분히 즐기실 수 있습니다. 한 병에 수십만 원을 훌쩍 뛰어넘는 보르도 그랑크뤼 등급의 와인의 탄닌에서 나오는 풀바디감을 내 혀로 직접 느낄 수 있다면 진정으로 행복하겠지만, 만원 전후의 와인들 중에서도 충분히 재미있는 와인들을 찾아 즐길 수 있습니다.


 물론 취미라는 것이 나 재미있자고 하는 것이지, 절대 남들께 보이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허세를 부리기 위하여 클래식 음악을 듣고 와인을 마실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평소에 관심이 있었는데 왠지 어려워 보여서 도전해 보지 못하셨다면 절대 겁내지 말고 시작해 보시라는 겁니다.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해봤는데 생각보다 재미있고 내게 맞더라.'라고 하신다면 이보다 더  그럴듯해 보이고 가성비 좋은 취미는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취미를 찾고 있다. 기왕이면 좀 그럴듯해 보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돈은 별로 없다. 오늘 저녁에 바로 마트에 가서 만 원짜리 와인 한 병 사고, 견과류와 치즈 좀 준비하고 나서, 유튜브의 검색창에 모차르트나 쇼팽을 검색하여 아무 음악이나 틀어보시기 바랍니다. 생각보다 할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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