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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희 Aug 04. 2024

단상기행_1

단편 쓰기

오전 9시 2분.

눈을 뜨자마자 습관이란 무섭다는 생각을 한다.

더 자도 되는데.

외국까지 와서 늦잠을 못 자면 너무 아쉽잖아.

억지로 눈을 감아 보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별 수 없네.

침대 맡에 앉아 태블릿을 켜고 음악을 듣는다.


이제 뭘 할까.

할 게 없어서 참 좋네.

어제 먹은 햄버거가 생각난다.

아직도 거길 가보지 않았냐는 동기의 말에 이번엔 도착하자마자 들렀었다.

음, 역시 별게 없었다.

머릿속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한국을 떠나면서 빈 껍질만 입고 오고 싶었지만 실패했다.


인천에서 미팅을 마치고 바로 공항으로 향했다.

깊은 밤을 달리는 택시 안에서 머릿속을 채운 알맹이들을 세어 보았다.

곧 이것들을 버리고 빈 껍질이 되어야지.

지긋지긋한 것들로부터 피해야만 했다.

공항 근처의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을 하는데 보스의 전화를 받았다.

"야, 가서 푹 쉬다 와.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머리만 비워. 알겠지, 존?"

물론, 실패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창문을 타고 흐르는 도시의 불빛을 보며 서울이나 라스베이거스나 똑같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여전히 그대로인데, 어딘가로 떠나서 달라질 것을 기대했다니.

멍청한 짓이다.

후배 B가 이렇게 말했다.

"그런다고 달라지겠어요? 어차피 선배님 머릿속에 고래가 있으면 그걸 죽이지 않고는 변할 게 없어요."

맞는 말이지.

세상이 멸망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변하겠어.


인천에서도 비가 내렸다.

깊은 밤, 조용한 호텔 방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잠을 방해했다.

'1408'이라는 룸 넘버가 음산할 만도 하지만 천장을 헤엄치는 고래를 잡느라 여념이 없었다.

작살을 던지고 그물을 끌어올려도 고래는 계속해서 태어났다.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히는 건 아니었다.

혼자가 되고 나니 숨어 지내던 욕망이 문을 열고 나왔을 뿐이다.

결국, 술래에게 잡힐 것을 알고 있었다.


몹 뮤지엄 앞에서 뜨거운 햇살을 받고 있자니 다운타운으로 들어가기 꺼려졌다.

아웃렛 구경을 하고 싶었는데 너무 더워서 진이 빠졌다.

외국의 냄새가 나를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갤러리의 쇼윈도에 비친 너머엔 머나먼 타국에서 상한 음식이 되어 버린 이방인이 서 있었다.

"아무거나 먹으면 식중독에 걸린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미안해. 하지만 너에게만 한 말은 아니야. 지금, 나에겐 모든 여자가 다 보균자야."

A팀장 검은 커피를 들고 두 눈으로 나를 태우고 있었다.

예전에 아내가 말했던 것처럼 이상한 표현을 또 해버린 것이다.


하늘에서 아침 해를 보고 저녁을 지나는 구름 사이를 지나 달이 뜨자 땅 위에 내렸다.

사실은 14시간 동안 하늘에 떠 있는 게 여전히 불안하다.

무서운 놀이기구를 계속 타고 있는 것처럼 불현듯 발 밑이 아득해진다.

비행기가 잠깐 흔들려 잠에서 깨었을 때, 바닥을 한참 보다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창문 너머의 풍경을 제대로 보진 못했다.

구름 너머의 아름다움보다 특별한 행색의 남자가 창 측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짙은 선글라스와 유대교 랍비가 떠오를 만큼 풍성한 수염, 빨간 넥타이와 검은 운동화가 남달랐다.

도대체 이런 사람이 언제부터 탔던 거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는 바로 고개를 돌려 항공사의 잡지를 펼쳤다.

하지만 늦었다.

"Howdy, Bro?"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움찔하며 바로 사과를 건넸다.

"Don't get me wrong. I didn't mean to."

남자는 괜찮다고 말하며 이것저것 말을 걸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느꼈던 위압감이 귀찮음으로 변하자 나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헤드폰을 꺼내 귀를 막아버렸다.


"오케이, 잘 자."

한국말을 할 줄 아는 랍비라니, 매우 귀한 일이지만 호기심을 꾹 누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 수다쟁이를 만나기엔 에너지가 부족했다.


선크림을 잔뜩 바르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자동차를 찾아 배회하고 있다.

렌터카 센터가 네바다 템플 근처에 있다더니, 살갗이 익어가기 충분한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시발, 찾기 쉽다고 했잖아.

겨우 네바다 템플을 찾고서야 지도 책을 접었다.

땀으로 흥건해지기 전에 부채로 쓸 수 있으니 천만다행이었다.

그런데, 낯이 익은 남자가 템플 근처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만난 랍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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