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10
3월 27일(격리 12일째) 금요일 맑음
거실 벽에 부착된 생활계획표 상 아이들의 하루 공부 시간은 오전 3시간, 오후 3시간 총 6시간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전 오후에 15분씩 배치된 쉬는 시간을 제외하고, 5시간 30분이다. 그러나 5시간 30분 내내 아이들이 집중을 해서 공부를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공부하는 곳’으로 알고 가는 학교에서도 어려운 일을 ‘쉬는 곳’으로 알고 있는 집에서 강요하면 아이들 입장에서, 정말 곤란하다. 아침을 먹고 9시 30분까지 거실의 책상에 앉는 것은 이제 별 문제가 없이 이어지는 하나의 루틴이 됐다. 그러나 공부시간이 끝날 무렵인 12시 30분쯤엔 거의 중구난방이 돼 있다. 아내나 나나 그 시간까지 군기를 잡을 수는 없는 일이다. 생각해보면 학교에서 하루에 7~8시간을 보내지만 교실에 있는 시간이 전부 책으로 공부하는 시간은 아니다.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을 제외한다 하더라도 미술도 있고, 체육도 있고, 음악도 있다. 친구들과의 문자 대화창이나 SNS, 학교에서 오는 메일 등에는 아이들과 함께 하면 좋을 인터넷 사이트에 대한 정보가 넘쳐난다. 그 모든 걸 다 체험하자면 하루 6시간도 모자랄 것이다.
둘째 담임에게서 거의 하루에 한 번 메일이 오는데, 오늘은 좀 특별한 숙제를 내주었다. 2주 동안 지내면서 느낀 점이나 재미있었던 일을 글로 쓰는 작문 숙제를 내 준 것이다. 월요일이 오기 전까지 보내면 된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이전에 내주었던 만들기 과제를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달라고 주문했다. 개학할 때 공작물을 가져오면 교실에 전시하겠다고 했다. 만들기의 주제는 재활용품 이용하기였다. 한 달 전부터 둘째가 우리에게 재활용품 공작을 해야 하니 다 쓴 페트병이나 주방세제 통을 버리지 모아달라고 했었다. 종이가방에 두둑하게 모아뒀는데 그걸 이용해서 해적선을 만들었다. 주방세제 통에 포도주 코르크를 불이고 돛을 달고 해적기를 그려 넣었다. 오후 시간을 만들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첫째와 셋째도 덩달아 뭔가를 만들었는데, 둘째가 배를 그럴듯하게 만들자 그 이상을 상상하기 어려웠는지 둘 다 배를 만들었다. 셋째는 형을 따라 비슷하게 생긴 해적선을, 첫째는 호수에 나들이 갔을 때 탈 법한 작은 배를 만들었다. 아내와 나도 오랜만에 만들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오전에는 첫째 방의 페인트칠을 계속했다. 오랜 준비작업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색을 입혔는데, 어제에 이어 오늘은 두 번째로 덧칠을 했다. 내일 세부적인 곳들을 손보고 대청소를 하면 옮겨두었던 첫째의 짐들을 다시 들여올 수 있을 것이다. 중간중간에 방이 바뀌어가는 것을 본 첫째는 매우 즐거워했다. 무엇보다 우중충한 톤의 벽지를 뜯고 환한 색으로 바꾸자 방의 채도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딸아이는 밝아져서 너무 좋다고 내게 고마워했다.
엊그제 예고됐던 중대 발표가 오늘 있었다. 총리는 이동제한 조치를 최소한 4월 15일까지로 연장한다고 밝혔다. 이 일기도 꽤 오래 쓰게 되겠군. 처음 휴교령이 내려졌을 때 예상했던 것이 맞았다. 4월 11일부터 2주 동안 부활절 방학이 예정돼 있는데, 이동제한 조치가 15일에 풀린다 하더라도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날은 4월 27일이 된다. 그래서 총 6주 동안 아이들과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가설도 4월 15일에 예정대로 휴교령이 풀린다는 전제 하에서 성립된다. 더 다양한 만들기 주제와 더 다양한 교육 동영상과 더 다양한 보드게임과 더 다양한 놀이거리를 개발해야만 하는 이유다. 우리로 치면 국회방송 TV 같은 채널에서도 교육 프로그램을 편성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아, 우리 집엔 TV가 없지.
순진한 우리 장인어른은 어떤 이유에서든 가족들이 붙어 지내야만 하는 상황이 된 것이 가족들의 유대를 위해 유리한 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항상 붙어 있으니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될 거라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러나 현실이 어디 그렇던가.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재미있는, 아니 슬픈 기사를 발견했다. 이동제한 조치 이후로 가정폭력이 늘어서 약국에 비상 호출기를 설치할 것이라는 내무부 장관의 발표 내용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도심 지역에서는 일주일 만에 36%, 시골 지역에서는 32% 가정폭력 사례가 늘었다고 한다. 장인어른이 예상했던 것과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나는 아내와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다. 아내가 학교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종종 받지만, 그럴 때는 접촉을 피한다. 페인트 칠을 하러 첫째 방에 가거나 증명서를 지참해 장 보러 가면 된다. 내가 백수 또는 재택근무 생활을 꽤 오래 한 덕에 둘이 아무리 붙어 있어도 웬만해선 싸움으로 번지는 일이 없다.
증명서를 지참하지 않고 밖을 싸돌아 다니다가 걸려 발급된 벌금의 건수가 26만 건에 달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이동제한 조치 이후로 쌓인 건수인데, 10만 명의 경찰이 동원돼 검문한 횟수는 총 430만 건이었다. 정부 관계자는 “국민들이 이동제한 조치 초기와 비교했을 때 점점 규칙을 잘 따르고 있다”라고 말했다. 시민단체와 노조 등은 폭력적인 공권력의 남용 사례라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아내는 “벌금 모아서 바이러스 퇴치에 보태려나”라고 한다. 연일 쏟아지는 정부의 지원 대책을 보면 그 액수가 어마어마하다. 벌금 액수는 초범은 135 유로이고 재범일 경우 최대 1500 유로까지 부과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135 유로로 통일했을 경우 총액수는 3510만 유로(약 473억 원)인데, 도움이 되더라도 아주 아주 제한적일 것이다.
지난주에는 잔디 깎기와 가지치기 등 정원 가꾸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고, 이번 주는 첫째 아이 방의 페인트를 칠하느라 시간을 보냈는데, 다음 주는 뭘 하며 시간을 보낼지 슬슬 고민을 해야 할 것 같다. 참, 주프랑스 한국대사관으로부터 이번 21대 총선의 재외국민 투표가 무산됐다는 안내 메일을 받았다. 기사를 찾아보니 프랑스를 포함해 모두 23개국에서 이 같은 결정이 이뤄졌다. 며칠 전부터 대사관 갈 때 아이들도 데리고 가서 텅 빈 파리 구경 좀 시켜줘야겠다, 생각했는데 무척 아쉽다. 투표근 단련을 많이 했는데, 이 아쉬움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얼마 후 중앙선관위에서 또 다른 메일이 도착했다. 제목은 ‘선거사무 중지 결정 및 투표 방법 안내’. 앗, 다른 방법으로 투표가 가능하다는 말인가. 떨리는 마음으로 파일을 열어 내용을 보니, 한국에 오면 투표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우이쒸. 이번 선거에서는 그야말로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