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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아 정씨 Apr 05. 2020

이 호화로운 조식 서비스

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17

4월 4일(격리 20일째) 토요일 맑음


아침에 나를 깨우는 건 그때그때 다르다. 혼자 살았던 총각 시절에는 주로 알람 소리가 나를 잠에서 깨웠을 것이다. 과음을 한 다음날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혼자가 아닌 여러 가족 구성원과 사는 지금은 침대에서 나오는 길이 훨씬 다양하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는 알람이다. 격리 이전에는 첫째가 7시 20분쯤 집에서 나가기 때문에 6시 50분에 알람이 울린다. 첫째는 6시 20분에 혼자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아침을 챙겨 먹는다. 격리 생활 이후에는 알람을 7시 30분으로 늦췄다. 9시 30분까지 공부할 준비를 마치면 되니까 그 정도면 될 것 같았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알람이 울리지 않게 설정해두었다. 아침의 늦잠은 우리 부부에게 사치이지만 포기할 수 없는 위시리스트이기도 하다. 기회만 된다면 잠에서 최대한 늦게 깨고 싶은 마음. 어린 나이의 아이가 있는 부모라면 쉽게 이해할 것이다.


알람의 설정 여부와 관계없이 넷째의 울음소리가 발동하면 아내와 나 둘 중 한 명은 움직여야 한다. 6시 30분 이전에 울면 달래서 다시 재우고 그 이후라면 우유를 준비한다. 최근에는 7시 30분에서 8시 사이에 일어나기 때문에 적어도 주중에는 내가 먼저 깨는 일이 더 많다. 넷째 외에 또 다른 변수는 셋째이다. 넷째가 태어난 이후 끊었던 손가락을 빠는 등 살짝 퇴행 현상을 보이는 셋째는 시도 때도 없이 우리 침대로 온다. 밤 중에 오면 내가 다시 들어서 셋째와 둘째가 함께 쓰는 방의 침대로 데려다주고, 아침에 오면 그냥 셋이 대충 얽혀 있게 된다. 아침에 오는 경우 이미 잠에서 깬 상태에서 우리 침대로 온 것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꼼지락거린다. 아내와 나 둘 중 한 명이 일어나야 셋째의 시위가 멈춘다. 첫째와 둘째는 엄마, 아빠가 최대한 아침잠을 늦게까지 자고 싶어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우리를 깨우지 않는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현명한 일이라는 걸 아는 것이다.


그러니까 토요일인 오늘은 알람이 아닌 셋째 또는 넷째가 나를 깨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격리 이후 세 번째 맞는 토요일의 아침을 깨운 것은 둘째였다. 짜잔 ~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을 비비며 다시 쳐다보니 둘째가 쟁반을 들고 서 있었다. “아빠 이것 여기에 놓을게요.” 급한 듯 얼른 쟁반을 내 무릎 위에 놓고 사라졌다 또 다른 쟁반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이번엔 아내를 깨워 쟁반을 놓고 또다시 어디론가 사라졌다. 쟁반에는 정성스러운 아침식사가 준비돼 있었다. 둘째는 누나인 첫째의 조식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급하게 간 것이었다. 내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와 사과주스, 그리고 버터와 쨈을 바른 바게트 두 조각과 어제 만든 쿠키 하나가 놓여 있었다. 너무 기가 막혀서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쟁반을 무릎에 제대로 두기 위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는데, 커피와 물의 양도 적당했다. 아내도 몸을 뒤척이며 쟁반을 제대로 놓으려던 순간 커피를 쏟고 말았다. 으 ~ 해피엔딩이면 재미가 없지, 라고 생각하면서 재빨리 이불 커버와 침대 커버를 다 벗겼지만 이미 커피 자국은 다 나고 난 이후였다.


부엌에 내려와 보니 역시 전쟁터였다. 끈적끈적한 쨈 자국은 식탁과 바닥 여기저기 찍혀 있고, 빵 부스러기가 정신없이 널려 있었다. 5성급 호텔의 조식 서비스에 비할 게 아닌 최고의 아침을 선물한 둘째에게 이 정도로 화를 낼 수는 없는 일이다. 이불솜까지 제대로 커피 얼룩이 나서 세탁하려면 빨래방에 가는 수고를 하게 됐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선물을 받은 기쁨이 훨씬 컸다. 이것도 코로나 덕이라고 해야 할까. 둘째는 평소에도 우리가 요리하는 모습을 유심히 보고 특히 빵이나 쿠키를 만들 때는 꼭 같이 하려고 하는 편이다. 물론 잿밥에 더 관심이 있다는 것쯤은 우리도 잘 안다. 예를 들어 초콜릿 케이크를 만들 때 제과용 주걱으로 초콜릿 반죽을 싹싹 쓸고 난 이후의 그 주걱이 바로 둘째의 타깃이다. 거기에 초콜릿이 듬뿍 묻어 있기 때문이다. 앞치마를 매고 아내의 요구에 따라 계란을 깨고, 밀가루를 붓고, 물을 나르는 요리 보조의 역할을 충실히 한 뒤에야 비로소 초콜릿 반죽이 뚝뚝 떨어지는 주걱을 핥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아내에게 쿠키나 케이크를 좀 자주 하자는 제안을 했었는데, 아내는 어제 오후 내가 넷째를 데리고 장 보러 나갔다 온 사이에 아이들과 함께 쿠키를 만들어놓았다. 점심과 저녁 식사 중간에 간식 타임이 있는데 바게트 빵을 먹기도 하고 과자류를 먹기도 한다. 아무래도 사 먹는 것보다는 집에서 만든 쿠키가 훨씬 맛있고, 쿠키를 만드는 시간 동안 아이들과 소통하는 재미도 있어서 제안했던 것이다. 사실 몇 해 전 크리스마스 때 친척들에게 선물하려고 우리가 만들었던 귀리 초콜릿 쿠키가 며칠 전부터 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상상 속에서 존재하던 맛이 혀에 직접 닿는 기쁨이란. 언젠가 우리가 한국에서 살게 된다면 아내에게 쿠키를 만들어 팔자고 제안할 것이다.


꽃샘추위를 부르던 칼바람이 자취를 감추자 봄이 성큼 다가왔다. 낮 최고기온이 20도에 가깝게 올라 커피 얼룩이 선명한 이불솜을 세탁하기 위해 첫째, 둘째를 데리고 무인 세탁방에 다녀왔을 때는 차 안이 후덥지근할 정도였다. 날씨가 풀리자 우리는 거실에서 정원 쪽으로 난 유리문을 열어두었다. 여름에는 그냥 열어두고 살기 때문에, 이 문의 개폐 여부가 날씨가 얼마나 따뜻한지를 가늠하는 척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오늘은 우리 모두가 집 안보다 정원에서 훨씬 많은 시간을 보냈다. 넷째도 제법 잔디 위를 기어 다닐 줄 알았다. 계획으로만 세우고 있었던 트램폴린이나 탁구대 구입을 미룬 것이 이렇게 후회될 줄이야. 아내는 실외에서 아이들이 놀만 한 게 있는지 찾다가 2년 전 여름에 처제로부터 받은 선물을 생각해냈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연결하는 외줄인데 우리는 정원 구석에 있는 체리나무와 중간에 있는 사과나무에 설치했다. 어림 잡아도 10미터는 돼 보여 줄이 닿을까 걱정했는데 딱 알맞았다. 아이들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외줄타기를 하며 놀았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씻으러 가기 전 그 짧은 시간에도 셋이 쪼르르 정원으로 달려 나갈 정도였다. 그런데 첫째가 급히 달려와 나를 찾았다. “아빠 스마트폰 가지고 여기 좀 와보세요.” 외줄이 설치된 체리나무에서 1미터쯤 떨어진 곳에 고슴도치가 서 있었다. 고요하던 풀밭에 인간 여섯이 나타나 시끄럽게 해 대는 바람에 꽤 겁을 먹은 것 같았다. 꼼짝하지 않고 웅크린 채로 멈춰 선 고슴도치의 굽은 등이 아주 약간 부풀어올랐다 제자리로 내려갔다. 조심스럽게 숨을 쉬는 모습에서 불안감이 전해졌다. 고슴도치도 한결 부드러워진 봄 날씨를 즐기러 나왔겠지.


날씨는 한풀 꺾였지만 바이러스의 기세는 여전했다. 게다가 코로나 사태 이후 요양원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수가 급속하게 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사망자 집계가 폭증하는 결과를 낳았다. 지금까지는 병원에서 사망한 사람들만 공식 발표했었다. 오늘 현재 요양원 사망자 2천28명을 더해 총사망자는 7천560명에 달했다. 병원 사망자 일일 집계는 전날보다 다소 낮아졌지만 중증환자 수는 계속 올라가는 중이다. 엊그제 총리가 격리 조치의 해제는 같은 날, 모든 지역과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 말에 대한 해설로 중국에서 했던 지역별 봉쇄령이 내려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를테면 우리 지역처럼 감염자가 많지 않은 곳은 우선적으로 격리가 해제되지만 감염이 심각한 지역, 예를 들면 파리나 그 주변 지역은 격리 조치가 유지된다는 말이다. 즉, 파리를 봉쇄하는 효과가 나기 때문에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파리와 주변 지역에 갈 수 없게 된다는 이야기다. 참, 파리의 초중고교생들은 오늘부터 2주간 부활절 방학이다. 오늘도 정부 관계자들은 TV에서 파리지앵들에게 떠나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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