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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아 정씨 Apr 19. 2020

팔찌가 좀 틀리면 어때

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30

4월 18일(격리 34일째) 토요일 흐림


솔직히 이제는 헷갈린다. 만약 일기를 쓰지 않았더라면 지금이 몇일인지, 무슨 요일인지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내게 중요한 요일은 딱 하나, 일요일이다. 그 날은 슈퍼마켓이 오전만 영업을 하고, 동네 빵집은 하루 종일 문을 닫기 때문이다. 바게트가 떨어지지 않게 하려면 토요일에 꼭 빵집에 다녀와야 하고, 급한 게 있다면 일요일 오전까지는 장을 봐야 일요일 오후에 재료가 없어서 뭔가를 못하는 낭패를 피할 수 있다. 남는 게 시간이라 그렇게 급한 건 사실, 없다. 일요일 오후에 못하면 월요일에 하면 되는 것이다. 


최근 들어 날짜 감각이 더욱 무뎌진 것은 격리 생활이 한 달을 넘기고 있는 것에 더해 지금이 방학 기간이기 때문이다. 방학이 시작되면서 내가 염려했던 그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가 빠르게 지나가버리는 느낌. 아이들은 뭔가에 항상 바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꼰대 아빠인지, 생산적인 행위를 하지 않으면 그 시간을 버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만다. 더군다나 오늘은 토요일이니까, 격리, 방학, 주말이라는 세 가지 휴일 모드가 섞여 격하게 쉬는 날이다. 쉬는 건 매한가지인데 쉬어야 할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는 방학 이후 새로운 놀이거리를 찾아내 바쁘게 지내고 있다. 브라질리언 팔찌 만들기. 면으로 된 색실을 모아 매듭을 짓거나 꼬아서 만드는 팔찌를 브라질리언 팔찌라고 부른다. 딸이 즐기는 취미활동 중 아내 본인이 어린 시절 즐기던 취미였던 종목들이 꽤 있다. 보드게임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취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브라질리언 팔찌이다. 팔찌나 반지, 귀걸이 같은 장신구 만들기도 아내의 취미이지만 첫째의 취미가 되지는 못했다. 전수를 시도했으나 아직 신체능력이 따라주지 않는 것인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장신구 만들기는 공구를 이용해 조이고 비틀어야 하기 때문에 의외로 물리적 힘이 중요하다. 


모든 부모는 자신의 취미를 아이에게 물려주려는 경향이 있다. 더 나아가 이루지 못했던 꿈을 자식에게 투사하여 대리 만족하려 하기도 한다. 자연스러운 행동인데 대개는 실패할 확률이 더 높다. 자식은 부모와 개별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우연히 부모와 자녀의 성향이 들어맞아 같은 것을 좋아할 수는 있지만 부모 자식 관계라고 해서 그 확률이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걸 아이에게 심어 대리 만족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아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데 노력을 기울이는 편이 더 낫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알아야 거기에 맞는 취미를 슬그머니 제안해볼 수 있을 테니까. 


예를 들어 브라질리언 팔찌는 좋은 예이다. 딸도 아들도, 실을 엮어 팔찌를 만드는 것을 매우 즐기기 때문이다. 반대의 예도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즐기던 야구 놀이는 아무리 아이들이 좋아하도록 유도하려 해도 쉽지 않다. 아이들과 잔디밭에서 캐치볼 하는 것은 가족을 이루면 꼭 해보고 싶은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가끔 아이들과 캐치볼을 하니까 완전 실패했다고 보긴 어렵지만, 아이가 먼저 와서 “아빠 야구해요.”라는 말을 들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 내 어린 시절의 취미가 아이의 취미로까지 이어진 경우라고 보긴 어렵다. 야구라는 스포츠가 전혀 생소한 나라에 살고 있어서 그런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저 면실로 짠 팔찌를 왜 브라질리언 팔찌라고 부르지, 라는 의문이 생겼다.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착용하고 있던 게 여행을 통해 세계화한 것이라는 위키피디아의 설명이다. 이 팔찌는 한 번 손목에 감으면 닳아져서 끊어질 때까지 뺄 수 없는데, 닳아져서 끊어지는 순간이 오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한다. 물론 중간에 일부러 끊으면 소원은 이뤄지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이것을 우정팔찌라고 불린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아마도 팔찌가 끊어질 때까지 우정을 간직하자는 의미일 테다. 


첫째는 이제 손이 빨라져서 하루에도 몇 개씩 뚝딱, 만들어내곤 한다. 한동안은 친구들의 생일 선물을 할 때 브라질리언 팔찌를 꼭 하나씩 넣어서 주기도 했다. 이때는 우정팔찌로 쓰였던 것이다. 취미도 사이클이 있어서 뜸하다가 격렬하게 가지고 놀다가, 를 반복한다. 격리 중 집안에 있는 여러 놀이거리를 찾던 첫째의 레이다망에 실바구니가 걸린 것이다. 둘째는 이제 걸음마 단계다. 팔찌를 만드는 과정은 매우 단순하고 반복적인데, 이런 작업의 특성상 중간에 꼭 집중력이 흐트러질 때가 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둘째의 팔찌에는 종종 패턴이 튀는 부분이 있다. 두 번 매듭 해야 할 곳에 한 번만 했다든가, 아예 빼먹고 다른 색으로 넘어갔다든가 한 경우다. 매듭을 지을 때 강하게 당기기 때문에 실수를 해도 돌이킬 수가 없다. 실수는 그대로 팔찌에 각인된다. 그게 아이들이 직접 만드는 브라질리언 팔찌의 매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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