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29
4월 17일(격리 33일째) 금요일 맑음
날씨가 풀리고, 서머타임이 실시되고, 가끔 바비큐를 굽는 계절이 다가오면 우리의 일상에서 빠질 수 없는 절차가 있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이 될 무렵이면 아이들이 와서 묻는다. “아뻬로 할 거예요?” 아내와 나 둘 중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면, 아이들은 “와” 하면서 척척 아뻬로를 준비한다. 감자칩 같은 간단한 스낵이나 올리브, 말린 소시지 등을 작은 접시에 담고, 석류나 복숭아 시럽을 물에 탄 본인들의 음료를 준비한다. 우리는 냉장고에 넣어둔 시원한 화이트 와인이나 로제 와인을 꺼낸다. 포르토나 핑크 마르티니 같은 베르무스를 잔에 담기도 한다. 갇혀 있어도 아뻬로는 계속된다.
아뻬로(apéro)는 아페리티프(aperitif)를 줄여서 친근하게 부르는 말이다. 아페리티프는 ‘열다’는 뜻의 라틴어 aperire가 어원이라고 한다. 아페리티프의 사전적 의미는 입맛을 돋우기 위해 식전에 마시는 알코올 정도 된다. 대표적 아페리티프인 베르무스는 포도주를 기본으로 여러 향료를 넣어 색과 맛을 더한다. 대개 달짝지근하고 도수는 15~20도 사이로 그냥 포도주보다 약간 세다. 입맛을 돋우는 용도여서 보통 한 잔, 많으면 두 잔 정도 마신다. 그러나 아뻬로는 그저 식전주라는 말로 간단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 많은 상징들이 숨어 있다. 적어도 프랑스인들에게는 그렇다. 그 안에서 아뻬로 인문학이라 할 정도의 철학을 엿볼 수도 있다.
프랑스에 이동제한령이 내린 뒤 아파트에 갇혀 있는 파리지앵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저녁 8시가 되면 테라스에 나와 살신성인 정신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의료진을 위해 박수를 치는 일 정도. 독일인들은 저녁 7시에 악기를 다루는 사람들이 각자의 집에서 음악을 연주했다. 이태리 사람들은 베란다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아파트에 사는 파리지앵들의 공동 행동이 하나 더 있었으니 그것은 테라스에 나와 아뻬로 즐기기였다. 각자의 잔에 술을 채우고 저 건너 테라스의 이웃과 원격으로 건배를 하고 아뻬로를 하는 것이다. 만약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거리라면 평소에 친분이 없었더라도 마치 친구가 된 것처럼 수다를 떨었을 것이다.
아뻬로는 식전주 문화를 통틀어 일컫는 말인데, 여름이면 특히 프랑스인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일상의 즐거움이 된다. 우리 가족이 이 시기에 갖는 아뻬로의 의미는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가족들과 가볍게 식전주를 부딪히는 편안함 같은 것이다. 우리가 처가가 있는 시골에서 지낼 때는 아뻬로의 의미가 본래와 더 가까워진다. 친구 초대하기를 무척 즐기는 장인 장모는 아뻬로에 친구들을 자주 초대한다. 장인 장모의 친구여서 우리와는 연배가 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함께 술잔을 들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그렇게 1시간 넘게 아뻬로를 갖는 경우도 적지 않다. 확실히 아페리티프 문화가 날씨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스페인의 타파스도 아페리티프와 연관이 있다. 반면, 핀란드나 스웨덴의 아페리티프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독일 역시 아페리티프 문화가 전반적으로 확산돼 있는 곳은 아니지만 슈투트가르트에 사는 처제 가족에는 슬그머니 자리 잡아 지금은 독일인인 아랫 동서가 더 즐긴다. 지난여름에는 장인 장모와 처제 부부까지 온 가족이 2주 동안 여름휴가를 보냈었다. 일주일은 바닷가에서 일주일은 처가에서 지냈는데 2주 동안 최소한 15번의 아뻬로는 가졌던 것 같다. 매일 저녁 아뻬로는 기본이고, 아주 가끔은 점심 아뻬로까지. 가장 열성적으로 술을 꺼내고, 간단한 안주를 준비한 뒤 “아 라뻬로!(아뻬로 시간이다!)”를 외친 사람이 아랫 동서이다. 격리 생활 중인 요즘엔 화상통화 앱을 통해 우리 가족과 원격 아뻬로를 즐기고 있다. 이쯤 되면 독일 사위의 아뻬로 사랑이 프랑스 사람을 넘는 걸로 봐야 한다.
이번 주 들어 우리 부부가 더욱 아뻬로를 자주 즐기고 있는 것은 이유가 있다. 부활절 이전의 사순절 동안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아뻬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해가 떨어지는 시간만 되면 와인 한 잔을 찾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고통을 받은 40일을 뜻하는 사순절에 기독교 신자들은 뭔가 자신만의 고행을 한다. 이 기간 동안 일정한 날에 육식을 하지 않는다거나 아예 금식을 하기도 한다. 우리 부부는 사순절이 오면 종종 ‘금아뻬로’를 선언한다. 부활절이 지난주에 끝났으므로 ‘금아뻬로’의 족쇄도 함께 풀렸다.
다만 아쉬운 점은 우리도 이 도시의 다른 친구들도 모두 갇힌 상태여서 아뻬로 타임을 함께 즐길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론의 여지없이, 프랑스에서 아페리티프는 핑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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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을 돋우는 것이라고? 딱 거기까지. 핵심은 다른 곳에 있다. 돋우긴 하는데 그 대상이 다르다. 생산성이라고는 한 줌도 찾아보기 어려운 이 아페리티프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편집증적 애착은 공동체가 현재를 즐기는 그리고 우정을 다지는 방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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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잃어버린 시간의 추억 속에, 인생에 특별히 행복했던 시간의 추억 속에 휴머니티에 대한 큰 가르침의 기억이 내게 다가왔다. 행복은 들판에 있지 않고, 소유에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행복은 나눔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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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나눔의 순간은 특별한 게 아니라 평범한 삶을 사랑하는 평범한 프랑스인들의 평범한 일상 속에 있는 평범한 관습일 뿐이다.
<프랑스적 삶의 방식 예찬론> 이브 루코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