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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아 정씨 Apr 17. 2020

격리 중엔 보드게임이지

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28

4월 16일(격리 32일째) 목요일 맑음


방학이든 주말이든 격리기간이든, 아이들 모두와 함께 지내는 휴일의 오전은 언제나 쏜살같이 지나간다. 커피 한 잔의 여유 같은 것은, 있더라도 정말 잠깐에 불과하다. 그렇게 숨 막히게 이어지는 리듬이 한 번 꺾이는 순간은 점심을 먹고 난 이후에 찾아온다. 넷째가 요즘 잠이 많이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점심 이후에는 대체로 잘 잔다. 배가 따뜻해진 넷째를 햇살 가득한 정원에서 조금 놀게 해 주면 더더욱 저항하지 않고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간다.


1~3번 아이들의 경우 점심이 끝나면 의무적으로 ‘조용한 시간’을 갖도록 유도한다. 조용한 시간이라 함은 1시간 30분 정도의 일정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행동에 제한을 둬서 몸도 마음도 편안하게 보내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이 시간 동안에는 두 가지 외에는 할 수 없다. 자거나 책을 읽거나. 아무리 입을 조그맣게 하고 슉, 솨, 를 하더라도 ‘조용한 시간’에는 레고나 플레이모빌을 가지고 놀 수 없다.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침대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아내가 정한 룰인데, 본인이 어렸을 때 주말이나 방학이면 지켰던 규칙이기도 하다.


프랑스인들이 아이들에게 대하는 방식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헷갈릴 때가 있다. 이건 아이를 위한 걸까, 어른을 위한 걸까. 지금은 나도 그런 프랑스식 교육에 완벽하게 적응해 있긴 하지만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되는 때가 있다. 조용한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이들일까, 어른들일까. 몇 개월 되지도 않은 갓난아이를 다른 방에서 따로 재우는 것은 아이의 독립성을 키워주기 위한 것일까, 부모가 조용히 자기 위한 것일까. 물론 두 가지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경험자인 나는 프랑스식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기보다는 부모의 욕망도 주요하게 고려되는 것 같아서다.


이렇게 4명의 아이들이 ‘조용한 시간’을 가지면 그때 리듬이 한 번 끊긴다. 나와 아내는 요즘처럼 날씨가 좋을 때는 정원으로 나가 함께 커피를 마신다. 커피를 마시면서 종종 보드게임을 한다. 최근에 한국에서 보내준 트리오미노스나 내가 좋아하는 루미큐브를 주로 하고 있다. 루미큐브는 한국에서 친구들과 카드로 했던 훌라 게임과 룰이 비슷해 옛날 생각을 나게 하는 점에서 손이 간다. 수포자 중 한 사람이긴 하지만 숫자를 가지고 노는 것은 좋아한다.


아내의 보드게임 사랑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처가에는 보드게임으로 가득 찬 가구가 있을 정도다. 아내에게 보드게임은 그냥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한 가족의 친밀도나 행복지수를 보여주는 바로미터 같은 역할을 하는 듯하다. 보드게임, 하면 왠지 화목하고 북적북적한 분위기가 떠오르는 게 사실이다.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때 열리는 아내의 가족 모임에 가면 보드게임이 빠지지 않는다. 그렇게 여럿이 모이는 경우에는 게임도 여럿 등장한다. 구성원 중 누군가가 새로 산 게임을 가져와서 선보이기도 하는데 가족모임에서 같이 해보고 마음에 들면 따로 구입해서 집에서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각자의 목록을 늘려간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집을 처음 방문했을 때 눈으로 구석구석 스캔을 하게 된다. 아내의 시선을 꼭 한 번 멈추게 하는 곳은 보드게임을 모아둔 장소이다. “아, 이 가족은 이 게임도 하는구나. 저 게임은 없네.” 명품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아내도 보드게임에는 욕심을 부리는 편이다. 잊을 만하면 하나씩 사서 모은 게 지금은 우리 집 책장에 수십 개 쌓여있다. 다행히 나도 보드게임을 좋아하게 돼서 어떤 게임이 요즘 잘 나가는지 안테나를 세우고 보게 된다. 보드게임도 유행이 있고, 스테디셀러가 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살 때도 우리 가족 모두를 위한 선물로 보드게임 한 개쯤은 구입을 한다. 1년에 최소한 1개는 생기게 되는 것이다. 한국에 방문할 때도 꼭 구입한다. 같은 게임도 한국이 훨씬 싸다.


나도 처음부터 보드게임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하다 보니 장점이 많은 것 같아 지금은 팬이 됐다. 보드게임 문화를 곁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내가 보드게임을 하지 않았던 것은 주변에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사실은 나도 틈 날 때면 한국식 보드게임을 했었다. 예를 들면 화투. (범위를 넓히면 카드놀이도 보드게임의 일종이다. 불어로는 보드게임을 Jeu de société, 즉 여럿이 하는 놀이라고 한다. '보드'가 중요한 게 아니라 '여럿이' 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다.) 친구 K처럼 광팬은 아니지만 옆에서 판이 벌어지면 구경만 하고 있지도 않았다. 보드게임을 좋아하는 유전자는 갖고 있었던 셈이다. 생각해보니 어렸을 때는 화투신동이라는 소리도 들었었다. 미취학 아동 주제에 오광을 달성하다니, 라면서 가족들이 나를 띄워줬던 기억도 어렴풋이 난다.


우리 부부가 보드게임을 즐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이들도 보드게임을 자주 한다. 아이들끼리 하기도 하고, 우리와 함께 하기도 한다. 그런데 각자 좋아하는 게임이 다르다 보니 게임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이미 화목한 분위기를 깨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루미큐브를 아이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다른 부모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니 아이들이 이기기 쉽지 않아서 그렇다고 한다. 이기기 어려우니 좋아할 리 없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당연한 말 같긴 하지만, 게임을 꼭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스토리가 있는 게임을 좋아한다. 오늘도 간식 시간이 지난 뒤 첫째가 제안한 ‘철도모험 게임’을 우리 부부와 첫째, 둘째 이렇게 넷이 했는데 첫째가 이겼다. 첫째가 제안한 게임을 하면 주로 첫째가 이기고, 둘째가 제안한 게임을 하면 주로 둘째가 이긴다. 이제 아이들이 루미큐브를 안 하려고 하는 이유를 제대로 알 것 같다. 가끔은 게임을 하는 중에 크게 폭발해서 판이 깨지기도 하는데, 첫째와 둘째가 크게 부딪힐 때 그런 일이 발생한다. 이런 경우는 차라리 안 하는 게 화목할 뻔한 경우랄까.


격리생활을 하면서 보드게임을 이전보다 더 자주 하게 됐다. 보드게임이 꼭 화목하게 시작되거나 화목하게 끝나지 않지만, 그걸 하면서 함께 보낸 시간이 기억 속 ‘화목’ 폴더에 남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뭐, 꼭 기억 속에 남지 않더라도 여럿이서 함께 무료한 시간을 달래는 데 보드게임만 한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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