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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아 정씨 Apr 14. 2020

학교 갈 날이 잡혔네

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26

4월 13일(격리 29일째) 월요일 맑음 강한 바람


내가 이렇게 프랑스 대통령의 연설을 기다리는 날이 올 줄이야. 오늘은 격리조치 연장과 관련된 마크롱 대통령의 담화가 예고된 날이다. 생방송 시각인 오후 8시는 아이들 돌보느라 한참 바쁜 시간이어서 9시께 아내와 함께 컴퓨터 앞에 앉아 유튜브를 통해 녹화방송을 시청했다. 


정리하자면, 

-  어린이집과 유치원, 초중고교는 5월 11일 다시 문을 열게 된다. 대학은 여름방학 때까지 휴교령을 이어간다. 

-  상업시설과 회사들도 같은 날 격리 조치를 해제하고 영업을 재개한다. 

-  다만 술집과 식당, 카페, 호텔, 극장, 공연장, 박물관 등은 7월 중순까지 폐쇄 조치가 계속된다. 각종 축제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이에 따라 개최 여부가 불투명했던 아비뇽 축제는 취소됐다.)

-  새로운 결정이 나올 때까지 비유럽 국가를 상대로는 국경 폐쇄를 유지한다. 

-  코로나 바이러스에 취약한 사람들(노인)은 격리 조치를 지속한다. 

-  바이러스 검사를 점차 확대해서 5월 11일 이후에는 증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검사를 받을 수 있게 할 것이다. 마스크 확보에도 최대한 노력할 것이다.

등으로 요약할 수 있고, 소상공인 경제 지원이나 아프리카 부채 탕감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지만 오늘 연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학 날짜가 확정됐다는 사실이다. 이 모든 조치의 전제조건은 프랑스인들이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5월 11일까지 격리 조치에 잘 따라줬을 경우이다. 


마크롱은 비장하고도 담담한 표정으로 그리고 겸손한 자세로 연설을 이어나갔다. 프랑스의 대처가 늦었으며 마스크나 검사 키트 등이 부족한 사실도 인정했다. 가장 먼저 의료인에게, 두 번째로 마트 계산원이나 농업 종사자 등 재택근무로 대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세 번째로 격리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모든 프랑스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면서 아직 길이 더 남았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힘겹지만 결국은 이겨낼 것이라는 요지의 연설은 “공화국 만세, 프랑스 만세”로 끝을 맺었다. 


초중고교의 개학이 5월 11일로 정해진 이유에 대해 마크롱은 이렇게 설명했다. 


“현재의 상황은 아이들의 불평등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특히 빈민가나 시골에 살며 인터넷의 접근이 제한된 아이들은 학교로부터 멀어져 부모로부터 도움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거와 가족 환경의 불평등 문제는 이런 시기에 더욱 악화됩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학교로 가는 길을 열어줄 수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유만 들으면 그럴듯하다. 역시 인권의 나라라 할만하다. 그러나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는 위선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아이들을 학교에 먼저 보내는 것은 경제의 추락을 막기 위해서 아니냐는 것이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부모가 일하러 갈 수 있고, 부모가 일을 해야 경제가 돌아가니까. 담화 이후 여러 교사 노조에서 나온 반응도 대체로 비슷했다. 프랑스 최대의 초등학교 교사 노조인 초등교원노조(Snuipp-FSU) 프랑세트 포피노 사무총장은 “대비책이 부족하다. 교사들의 이해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교사가 국가경제라는 재단의 희생물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라고 밝혔다. 극장이나 박물관 같은 다중이용 공공시설은 폐쇄하면서 감염의 위험이 매우 높은 학교를 개방한다는 것이 난센스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크롱의 비장하고 담담한 표정과 겸손한 자세는 베테랑 배우의 연기처럼 보였다. 


다른 정치인들 역시 대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일부 해제이긴 하지만 대책 마련이 미흡하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아직도 마스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은 현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반응들이었다.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시점이다. 아직 한 달이나 더 갇혀 지내야 하는 처지이지만 내심 여름 방학까지 격리 조치가 이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쩌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두려워서 그런 바람을 가졌던 것일 수도 있다. 예전과는 어떻게 다른 세계가 펼쳐지게 될까. 나는 이전에 했던 일을 그대로 할 수가 있을까. 할 수 없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가까운 미래에 대한 불안은 사람을 위축시키는 효과가 있나 보다. 우리의 삶에 거대한 단절이 생겼고, 다시 이어가기 위해서는 이전처럼 하면 되는 게 아니라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내일 아침에 아이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주면 좋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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