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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아 정씨 Apr 13. 2020

이런 부활절, 저런 망상

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25

4월 12일(격리 28일째) 일요일 맑음


우리나라의 가장 큰 명절이 설날과 추석이라면, 프랑스에서는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이다. 그냥 종교에서 정한 특별한 날일 뿐인데 내가 한국적 의미가 담긴 명절이란 단어를 쓴 이유는 프랑스에서도 이때가 되면 온 가족이 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느낌이 비슷하다. 설날과 추석에 10시간 넘게 자동차 안에 갇혀있는 고통을 감내하고서라도 부모님을 찾아뵙고 형제자매들을 만나 시간을 보내듯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에는 만사를 제치고 휴가를 내서 가족들을 만나러 간다. 이 기간에는 전국의 고속도로가 만원이 된다. 가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이 두 축제가 다가오면 온 가족이 모여서 함께 보낸다. 그래서 더욱 우리나라 신문지상에 자주 등장하는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문구와 어울린다. 


특히 부활절이 한국의 명절과 더 비슷한 느낌을 주는 이유 중 하나는 날짜가 매년 바뀌기 때문이다. 설날이나 추석이 음력에 따라 날짜가 바뀌듯, 부활절은 기독교의 달력에 따라 매년 달라진다. 지난해에는 4월 21일이었고, 올해는 4월 12일이다. 4월 중순인 것은 확실하지만 날짜는 매년 다르다. 지난해 부활절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 때문이다. 부활절 다음날 월요일에 넷째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지난해 부활절에는 우리 집에서 명절을 쇴다. 프랑스의 남서쪽 보르도 인근의 뽕도라에 있는 장인 장모도, 스투트가르트에 사는 처제 부부도 블루아로 집결했다. 뽕도라에서 여기까지는 차로 5시간 정도, 스투트가르트에서는 8시간 정도 걸린다. 원래는 뽕도라에서 다 모이는 것이 일반적인데, 지리적으로 중간쯤에 위치한 우리 집에서 한 번 해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우리도 흔쾌히 동의해서 이뤄지게 됐다. 부활절이 오기 일주일 전에 모여서 일주일 동안 세 식구, 총 10명이 함께 지냈다. 어른 여섯에 아이들 넷. 아내는 만삭이었다. 예정일은 아직 3주 정도 남은 상태였지만, 앞에 나온 세 아이들 역시 2~3주 먼저 나온지라 넷째가 나오는 날도 머지않았음을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족들이 있을 때 나오면 내가 병원에 가 있는 동안 다른 가족들이 나머지 세 아이들을 돌봐줄 수 있으니 현실적인 이점이 있었다. 


부활절의 다음날 월요일은 법정 공휴일이어서, 부활절을 지낸 가족들이 헤어지는 날이었다. 화요일부터는 모두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게 돼있었다. 아내는 그날 새벽에 진통을 느꼈고, 우리는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독일팀은 예정대로 떠났고, 장인 장모는 며칠 더 머무르기로 했다. 나는 부활절 방학 기간 내내 아내의 뱃속에 있는 넷째에게 “네가 우리를 도와주고 싶다면 정말 늦어도 월요일에는 나와주라.”라고 부탁을 했었다. 만약 장인 장모가 없었다면, 아내와 내가 병원에 가 있는 동안 아이들을 돌봐줄 사람들을 수소문하는 번거로움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이 도시에서 우리가 친하게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대개 아이들 수가 3~6명 정도 되기 때문에 세 아이들을 하루 정도 보낼 가족을 찾는 일이 어렵진 않다. 숟가락 하나만 더 놓으면 되고 사정을 서로 다 아는 데다 그들이 우리와 같은 처지에 놓였을 때 우리가 도움을 줄 수도 있어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넷째가 나의 부탁을 들어줌으로 이런 절차들을 생략할 수 있었다. 


분양을 기다리고 있는 토끼와 오리 모양 초콜릿. 올해는 글렀다.

어린 시절 내가 가진 부활절의 기억은 성당에 모여 삶은 계란에 열심히 색칠을 하던 모습이다. 물감이 흰자에 스며들어 먹기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달걀도 있었다. 프랑스에서 어른들은 푸아그라와 양고기를 먹고, 아이들은 초콜릿을 양껏 먹을 수 있다. 달걀 모양을 대표로 한 각양각색의 초콜릿들이 부활을 앞두고 슈퍼마켓에 쫙 깔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초콜릿 회사와 푸아그라나 양 축산 농가 입장에서는 부활절이 대목인데 올해는 죽을 쑤게 생겼다. 우리의 경우만 해도 온 가족이 모였을 때 샀을 초콜릿 양의 절반도 안 되는, 최소한의 양만 구입했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정원에 초콜릿을 숨겨두면 점심 식사를 마친 아이들이 바구니를 들고 다니면서 초콜릿을 찾는다. 마치 보물찾기 놀이하듯. 쌓인 초콜릿 더미를 보며 아이들은 행복에 젖는다. 초콜릿을 공식적으로 그렇게 많이 먹을 수 있는 날은 부활절이 유일하다. 


성당에 가지 못하고 가족들과 보내지도 못한 특별한 부활절에 뉴스를 훑어보며 의문이 생겼다. 오늘 현재 프랑스의 확진자 수는 9만 5천403명, 사망자는 1만 4천393명이다. 4월 들어 사망자 수가 폭증했는데 이는 요양원 등 사회복지시설에서 감염돼 사망한 사람들의 수까지 통계에 넣었기 때문이다. 전체 사망자 중 9천253명은 병원에서 숨졌고, 5천140명은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요양원 사망자가 3분의 1을 넘는다. 병원에서 숨진 사람 중에서 60세 이상 비율이 절반을 넘는다. 그렇게 따지면 전체 사망자 가운데 노인들의 사망률은 3분의 2를 웃돈다. 프랑스 정부가 또는 프랑스인들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경각심을 덜 갖는 이유는 어쩌면 주로 노인들이 사망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정부 입장에서는 노인들에 들어가는 퇴직 연금을 절약할 수 있고, 늙은 부모를 가진 프랑스인들에게는 유산이 생긴다. 


중도우파인 공화당의 에릭 치오티 국회의원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충격적이고 화가 난다”면서 “우리가 노인들을 죽게 방치했다. 요양원에서 감염된 사람들의 입원 치료를 거부함으로써 이들을 무관심 속에 사망하게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확진자도 사망자도 전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이 나라에서 확진자의 동선을 공개하는 애플리케이션에 대한 찬반이 45대 46으로 여전히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전방위적인 검사는 아직도 하지 않고 있다.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여전히 독일처럼 검사를 확대해야 하나? 같은 기사가 등장한다. 이 특별한 부활절에 스친 나의 생각은 그저 망상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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