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24
4월 11일(격리 27일째) 토요일 맑음
부활절 방학 첫날이자 토요일이고, 부활 전야다. 그러나 우리에겐 격리된 여러 날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지난주 토요일 파리 지역 초중고교가 방학에 들어갔을 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정부는 군과 경찰 16만 명을 동원해 단속을 실시했다고 한다. 격리 조치를 무시하고, 또는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바캉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돌려보내기 위해서다. 이들은 주로 휴가지에 가서 격리생활을 이어갈 것이라고 항변한다고 한다. 그러나 휴가를 위한 이동은 정부가 허가한 예외조항에 들어있지 않다. 어떤 프랑스 가족들이 방학을 맞아 스페인에 갔다가 경찰에 적발돼 벌금 600 유로를 물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는 기사도 오늘 나왔다. 스페인과 프랑스 국경은 현재 공식적으로 닫힌 상태여서 최소한의 출입만 가능한데 이들은 밤 시간 국도 등을 이용해 스페인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고 기사에서는 전했다. 휴가에 대한 종교에 가까운 신념을 몸소 실천하다 그 뜻이 순교당한 것이다. 아니면 단순히 오래전 예약한 호텔이나 펜션의 숙박 요금을 환불해주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
격리 조치가 길어지자 프랑스인들의 일탈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날씨가 본격적으로 포근해진 지난주부터 파리에서는 10~19시 사이에 조깅이 금지됐다. 낮 시간에 너무 많은 조깅족, 산책족들이 파리의 거리를 부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려진 조치였다. 그런데 이 조치 역시 조삼모사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10시 이전과 19시 이후로 모든 조깅족들이 집결하기 때문이다.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없어 아쉬울 따름이지만, TV 뉴스 화면으로 본 센 강변은 화창한 날의 주말처럼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한가하게 걷는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조깅족들이 강변을 달리고 있었다. 걷든 뛰든 마스크를 쓴 사람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파리의 주거 환경을 잘 아는 처지에서 이해가 되긴 하지만, 우리만 너무 순진하게 격리 조치를 칼같이 지키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뉴스 화면에서 보는 파리뿐 아니라 일상적으로 가는 우리 동네 슈퍼마켓에서도 전보다 긴장감이 많이 떨어진 느낌을 받는다. 바리케이드를 이용해 출입구를 좁게 해서 고객 수를 제한하던 격리 조치 초기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출입구를 전처럼 다 열었고, 슈퍼마켓 입구에서 줄을 서는 일도 없어졌다. 물론 전보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의 수는 월등히 많아졌지만, 아직도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이 절반은 되는 것 같다. 인터넷과 SNS에는 마스크 직접 만들기 레시피가 꽤 활발하게 유통되고 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명품 중 하나인 루이뷔통이 6곳의 공장에서 일주일에 10만 개의 마스크를 생산하고 있고, 다음 주부터는 의료용 가운도 제작한다고 한다. 우와, 희귀 아이템 아닌가. 그런데 마스크도 의료진 용이어서 LV 마크가 찍힌 마스크를 직접 보긴 어려울 것 같다.
프랑스인들이 격리 생활을 더 힘들어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매일 최고기온을 경신하고 있는 요즘 날씨 때문이다. 겨울 일조량이 한국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적은 프랑스에서는 꽃들이 봉우리를 터뜨리는 4월경 비가 주춤하고 햇살이 좋아지면 모든 사람들이 밖으로 나온다. 비타민 D를 보충하기 위해 공원이며, 카페 테라스며, 강변로며, 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자리를 잡는다. 파리 도심의 오페라 아래 돌계단은 햇살 샤워하기 좋은 곳으로 유명하다. 구름이 낀 날에도 잠깐 해가 모습을 드러내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사람들이 금세 계단을 가득 채운다. 광장이 잘 내려다 보이는 2층 카페에 앉아 해의 움직임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노라면 시간이 금방 간다.
며칠 전부터 우리도 햇살을 최대한으로 즐기기 위해 테라스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저녁 때면 특히 멀리서 단백질 타는 냄새가 우리의 코로 스며든다. 그렇다, 이 동네 어디선가 피우는 숯불 바비큐 연기가 넘어오는 것이다. 바비큐야말로 어둡고 침침한 계절이 가고, 바캉스와 아페리티프가 있는 초록의 시간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탄의 마침표라고 할 수 있다. 계절은 한꺼번에 가고 오지 않는다. 내가 그 신호탄을 가장 먼저 감지하는 것은 출근길 자동차 앞 유리의 성에다. 성에가 얇아져서 없애는데 시간이 거의 걸리지 않을 때 이제 겨울이 가려나, 하고 알아챈다. 이후로는 재촉하지 않아도 알아서 온다. 외투가 거추장스러워지고, 벽난로 청소를 하고, 테라스 쪽으로 난 거실의 유리문을 열어두고, 화단의 잡초를 뽑고,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다. 서머타임이 적용되면서 밤이 길어지고, 난방을 꺼도 춥지 않게 됐다. 이제, 바비큐에 불을 지필 시간이다.
우리 부부는 고기를 썩 즐기지 않는 편이다. 그렇지만 바비큐는 가끔 피운다. 고기 외에 샐러드 정도만 있으면 돼서 준비하는 데 손이 덜 가는 장점도 있다. 오늘 점심은 바비큐를 먹기로 했다. 어제 저녁식사 때 우리에게 고기 굽는 냄새를 날려준 이웃에게 보내는 답장이라고나 할까. 이런 날에 대비해 숯도 한 포대 구입해놓았다. 바비큐 그릴은 이 집에 이사 오던 해 독일 사는 처제가 선물해줬다. 바비큐의 매력은 무엇보다 분위기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과 숯불이 일상에서 잠시 벗어난 느낌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는 자기가 불을 붙이겠다고, 내가 고기 사러 간다고 할 때부터 일찌감치 예약했다.
날씨가 풀리고 해가 나오는 시간이 길어지면 정원이 넓은 처가에서는 특히 바비큐를 자주 먹는다. 거기에서도 내가 불 담당이다. 둘째가 불장난을 좋아하는 걸 충분히 이해하는 이유는 나도 그 나이에 그랬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도 좋아한다. 바비큐 불 담당을 10년 정도 하다 보니 나름의 노하우도 생겼다. 고기를 구워서 각자의 접시에 담아주면, 가족들이 정말 알맞게 잘 구워졌다고 칭찬이 자자하다. 나를 불 담당 붙박이로 두려는 수작인지, 아니면 진짜로 맛있어서인지 알 수 없지만 불장난을 좋아하는 나로선 불장난도 하고 칭찬도 받았으니 나쁠 게 없다. 숯불이 되기 위해 바비큐 그릴 안에 활활 타오르는 장작과 풀밭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번갈아 보고 있는 내게 아내는 시원한 아페리티프를 가져다준다. 와인잔을 들고 장인, 장모 또는 외삼촌 부부, 처제 부부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여름밤이 소리 없이 깊어간다. 우리 가족의 여름 일상을 올해에도 이어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