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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아 정씨 Apr 11. 2020

수고 많았어, 엄지야

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23

4월 10일(격리 26일째) 금요일 맑음


아내가 셋째를 임신했을 때 우리 네 식구는 서울에 살고 있었다. 6월로 예정된 셋째의 출산을 위해 우리는 4월부터 프랑스의 처가에서 지냈다. 아내의 직장이 프랑스 시스템을 적용하는 곳이어서 가능했다. 셋째 아이부터는 출산휴가가 6개월이다. 당시 첫째의 나이는 5살, 둘째는 3살이었다. 2016년 봄과 여름의 사진을 지금 들춰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셋째가 세상에 나오기 전과 나온 뒤 둘째의 표정이 얼마나 다른지. 아내의 배가 만삭에 가까워졌을 때 아내는 운동 삼아 더 자주 산책을 했는데, 네 식구가 함께 걷던 그 순간이 기록된 사진 속의 둘째는 세상을 다 가진 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내는 틈만 나면 “곧 동생이 나올 거야. 우리의 새로운 가족이야. 네가 예뻐해 줘야 해.”라고 둘째에게 안심을 시켰다. 둘째도 곧잘 알아듣는 것 같았다.


막 태어나 아직 쭈굴쭈굴한 셋째를 처음 본 둘째는 이렇게 말했다. “이거 뭐야, 엄마?” 이 아기도 아니고 이 사람도 아니고, “이거”란다. 우리는 적잖이 당황했다. 우리보다 더 당황한 것은 둘째였을 테지만, 그때 우리는 둘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그래서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첫째는 둘째가 태어난 뒤에도 행동에 변화가 크지 않았던 것이다. 셋째가 태어난 6월 중순 이후의 사진 속 둘째는 다크 서클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웃는 사진을 거의 찾을 수 없다. 그 해에 찍은 사진을 보면 둘째의 표정만 봐도 6월 중순 전인지, 6월 중순 이후인지를 알 수 있을 정도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둘째의 퇴행 현상은 강하고도 길게 이어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일어났을 때 둘째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온 지구가 흔들릴 정도로 울어재꼈다. 엄마가 본인의 눈 앞에 와야만 겨우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는데, 엄마는 셋째 보느라 귀한 몸이 돼있었다. 꼭 셋째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유 없는 생떼라고 판단했을 경우에는 먼저 울음을 멈추기 전에 엄마가 나타나는 경우는 없었다. 중간에서 나의 역할이 중요했는데, 나는 둘째에게 아웃 오브 안중이었기 때문에 대개는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었다. 참다 참다 어찌할 바를 몰라 엉덩이에 손이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의 안 좋은 기억 때문에 나는 둘째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언젠가 둘째에게 그때를 기억하느냐고 물었는데,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의 노력과 둘째의 노력이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셋째가 3살쯤 됐을 때였다. 그러니까 셋째를 동생으로 받아들이기까지 3년 정도 걸린 것이다. 둘째가 그리는 가족의 그림에 셋째가 등장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셋째와 넷째는 다섯 살 차이가 난다. 그래서 나는 은근히 기대했다. 5살이면 본인의 생각을 또렷하게 표현할 수 있는 나이이니, 둘째가 겪었던 것만큼 심한 과정은 없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 말이다. 확실히 둘째보다는 덜했지만, 셋째 역시 넷째가 태어난 이후 더 엄마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니 보이고 있다. 겉모습에서 눈에 띄는 점은 몇 년 동안 끊었던 손가락 빨기를 다시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애착 인형의 역할을 하는 갓난아기용 베개도 다시 지니고 다니기 시작했다. 아예 못하게 하는 것은 셋째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그래서 잘 때, 침대에서만 하는 것으로 유도를 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쉬울 리 없다. 얼마나 손가락을 빨아재끼는지 올 겨울에는 오른쪽 엄지 손가락이 갈라져 핏자국이 났을 정도였다. 그런 경우에는 고민할 것도 없이 왼손 엄지를 입으로 가져간다.


프랑스에서는 아이들이 손가락 빠는 행위에 대해 관대하다. 한국에서처럼 매니큐어를 바른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강제로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 한국에서 살아본 경험으로 손가락 빠는 아이를 보는 한국인들의 시선은 꽤 차갑다. 우리가 한국에 살 때 첫째가 손가락을 빨았기 때문에 느낀 점인데, 손가락 빠는 아이를 정서가 불안해서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좀 아픈 아이로 보는 것 같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정서 불안을 상쇄시켜주는 스스로의 방어 기제 정도로 인식하는 게 아닌가 싶다. 더 나아가 정서 불안과 손가락 빨기는 크게 연관이 없으며 그 습관을 가진 아이들은 아무리 엄마가 안아줘도 스스로 결심하지 않으면 멈출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머리 아픈 이유가 아니라 손가락을 빨려는 아이와 다투기 싫어서 그냥 놔두는 경우가 대부분일 수도 있다. 프랑스에서 치아 보정을 하는 청소년기 아이들이 많은 이유가 손가락 빨기를 너무 늦게까지 방치해서라는 분석도 있다.


한국 사람, 프랑스 사람이 같이 사는 집 아니랄까 봐 우리 집에는 두 가지 대응방식이 상존하고 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손가락 빨기를 끝내보려고 노력하는 편이고, 아내는 스스로 끊을 때까지 놔두자는 편이다. 서로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아서 이 문제로 부딪히지는 않지만 상대의 입장은 서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셋째에게 제안한 것이 침대 밖으로 애착 인형 가지고 나가지 않기, 이다. 아무래도 애착 인형이 손에 없으면 손가락을 덜 빨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그냥 나의 바람일 뿐이다.


오전부터 셋째가 시들시들했다.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입맛이 없어 보였다. 점심때 혀를 내밀어 아프다고 말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혀에 돌기 하나가 생겼다. 신경 쓰이는지 제대로 먹지를 못했다. 아내가 지나치듯 말했다. “너 맨날 정원에서 흙 만지고 놀고 손도 안 씻고 손가락 쪽쪽 빠니까 그런 거 생기지.” 셋째는 듣기 싫은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뭔가 신경이 쓰이는 듯했다. 점심 이후 나는 오랜만에 정원 풀밭에 돗자리를 깔고 낮잠을 청했다. 적당한 낮잠은 역시, 항상 옳다. 거실로 가보니 아이들 셋은 서로 몰려다니면서 뭔가를 꾸미고 있는 듯했다.


저 네모가 채워지면 넷째의 엄지는 자유로워질까.

짜잔, 하면서 첫째가 뭔가 대단한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셋째의 손가락을 내밀었다. 키친타월 한 장을 돌돌 말아서 엄지를 감고 거기에 고무줄로 고정했다. 식사도 못할 정도로 날카로운 혀의 고통이 많이 거슬렀나 보다. 셋째는 손가락 빨기를 끊기로 결심한 것이다. 첫째와 둘째는 아침 점심 저녁에 각각 두 칸의 네모, 하루에 총 여섯 칸이 그려진 계획표도 만들었다. 손을 씻고 네모 안에 동그라미, 밴드를 붙이고 네모 안에 동그라미를 그리면 된다. 나는 “너 넷째 태어나기 전에는 손가락 안 빨았었어.”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음을 강조했다. 첫째와 둘째는 저녁식사 이후에 셋째가 손을 씻고 밴드를 붙이는 것을 도와줬다. 셋째는 아무 불평 없이 순순히 자신의 엄지를 누나와 형에게 내줬다. 내 생각과는 다르게 매우 어려운 일이어서 이번 시도가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셋째의 결심을 진심으로 지지한다. 셋째의 엄지가 자유로워지길 기원해본다.


오늘부터 우리 지역도 2주 간의 방학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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