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21
4월 8일(격리 24일째) 수요일 맑음
며칠 전 비가 내린 날 체리나무에 열려 있던 꽃들은 대부분 떨어지고 말았다. 체리나무의 꽃이 4월경 한국에서 흔히 보는 벚꽃과 같다는 걸 안 것은 프랑스에 온 뒤였다. 벚꽃나무를 불어로 일본 체리나무라고 부르길래 유심히 보니 그게 그거였다. 난 태어난 곳이 시골이어서 촌놈이지 꽃이나 나무 이름은 젬병이다. 반면, 아내는 웬만한 꽃과 나무는 물론 풀의 이름도 줄줄 꿴다. 아내가 이름을 말하면 나는 그 단어를 사전에서 다시 찾아보고는 아 이거, 한다. 민들레와 진달래도 헷갈리는 수준이니 말 다했다. 벚꽃은 만개했을 때뿐 아니라 질 때도 아름답다. 하얀 꽃잎이 바람에 실려 날아가면 멍하니 보고 있게 된다. 오늘 그랬다. 영화 속 슬로모션 효과가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한 착각을 준다. 눈이 내릴 때는 아름답지만 내리고 난 뒤 도시 전체를 지저분하게 만드는 것처럼, 체리나무 꽃잎도 내 근육통과 바꾸며 깨끗하게 청소한 테라스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렸다. 체리나무가 꽃을 떨구자, 사과나무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사과나무 옆의 보라색 라일락꽃과 잘 어울렸다.
이런 한가한 생각을 하던 한가한 수요일 오후였다. 담벼락 너머 이웃집에서 아부바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웃 부부들이 돌봐주는 다섯 살짜리 아이인데 우리 셋째와 나이가 같아서 친구 먹은 지 세 달 정도 됐다. 가끔 서로의 집을 오가면서 논다. 엄마와 둘이 사는 아부바카는 엄마가 돌 볼 수 없을 때 이웃집에 와서 돌봄을 받는다. 이웃 부부가 마치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프리카 이민자들의 정착을 위한 활동의 일환이었다. 아부바카가 20개월이던 때부터 인연을 맺었으니 거의 친손주처럼 아껴준다. 이웃 아부바카가 담 너머에서 셋째를 부르고 있었다. 셋째는 집을 통과해 앞마당으로 향했다. 정원에서는 벽으로 막혀 있어 이웃집과 통하려면 집 앞마당으로 가야 한다.
속으로 생각했다. 그냥 멀리서 목소리로만 이야기 나누면서 놀지 왜 만나러 가지? 아부바카를 집으로 데려오는 건 아니겠지. 걔네 엄마가 간호조무사여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가능성이 있는 거 아닐까. 이웃집 부부가 그렇게 분별없는 사람들은 아니지.
셋째는 한 손에 종이 한 장을 들고 돌아왔다. 아부바카가 셋째를 위해 쓴 편지였다. “나랑 같이 아프리카 가자. 가서 사막에서 치타 보자.” 셋째와 같은 학년인데 글씨를 훨씬 잘 썼다. 셋째가 이웃집에 다녀온 그 짧은 시간 동안 내 머릿속을 스쳤던 생각들 때문에 조금 무안했다. 그래서인지 편지를 보며 셋째 앞에서 오버액션을 했다. “아부바카 최고다. 너무 멋지다.” 하면서 말이다. 이번에는 첫째와 둘째가 부산하게 움직였다. 셋째가 답장을 쓸 차례였다. 첫째가 물었다. “아빠, 한국에서 유명한 동물이 뭐죠?” 나는 “어어, 호랑이?”라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아니, 그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지. 나는 다시 “아니, 호랑이 아니야.”라고 정정했다. “세계에서 해가 처음으로 뜨는 나라니까 해 보러 같이 가자고 해.” “먹는 건 뭐가 유명하죠?” “불고기!” 나는 아이들의 숙제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아무 말이나 하고 있었다. 얼마 후 셋째가 완성된 편지를 가지고 나타났다. “나랑 같이 산 보러 한국 가자. 네가 오길 바랄게.” 아프리카의 치타보다 강력하지는 않았지만, 호랑이나 불고기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편지와 마이쮸 두 개, 색종이로 접은 개구리를 들고 이웃집에 가서 전달하고 왔다. 이웃 아주머니는 아이들 손에 직접 만든 쿠키를 들려 보냈다.
다시 한번 셋째에게, 아부바카에게 그리고 이웃 부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 미안한 것은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수요일은 평소에도 오전 공부만 하고 집에 오기 때문에 약간 쉬어가는 날이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반공일”이라 불렀던 토요일처럼 말이다. 아침식사를 마친 뒤 아이들에게 씻고 옷 입으라면서 다그치는 투로 말했더니, 아내가 짜증 섞인 반응을 보였다. 왜 수요일까지 바쁘게 재촉하느냐고. 한국사람이어서 빨리빨리 하느라고 그랬어,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음 주부터 공식적인 방학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전에 학생들 성적 내고 일일이 멘트 써서 가정통신문 내느라 바빠서 신경이 곤두서 있나, 했다. 아내는 확실히 격리 이후로 잠이 많이 부족했다. 오전 내내 아내는 컴퓨터 앞에서 뭔가에 몰두했다. 나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러려니 하고 내 할 일을 했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육체노동이 최고다. 오늘따라 넷째는 잠도 없었다. 점심 준비를 하고 넷째랑 놀아주고 오후에는 심지어 김치까지 담았다. 파리에 살 때는 한인 슈퍼에서 사 먹는 종가집 김치면 충분했는데 여기에서는 김치를 구할 수가 없어 직접 만들어 먹는 중이다. 아내도 아이들도 맛있다고 한다. 내가 먹어도 맛있다. 아마 우리가 다시 파리에 살더라도 이제 김치는 내 손으로 담그지 않을까. 간식시간쯤 화색이 도는 얼굴로 아내가 나타났다.
사연은 이랬다. 지금은 아이들의 내년 학기 입학 서류를 작성하는 시기이다. 9월 개학이니 기존에 다니는 학생들은 4월이면 다시 그 학교에 계속 다닐지 아니면 학교를 바꿀지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이다. 원래 원서 접수일은 3월 말이었는데 우리는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평균적으로 등록금이 오르기도 했고, 지난해 우리가 정부에서 받은 보조금이 많아서 카테고리가 높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카테고리가 높아지면 자연히 등록금도 올라간다. 등록금은 부모의 소득 수준과 가족 수 등에 비례해 다섯 등급으로 나뉜다. 만약에 카테고리를 예전처럼 낮추지 않으면 다른 학교로 보내야 하나, 까지 고민하던 차였다. 그래서 교장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우리가 편지 쓰기로 한 것이 3주 전이었는데, 아내는 3주 동안 끙끙 앓고 있었던 것이다. 불어로 쓰는 편지라 내가 도와줄 수도 없었다. 게다가 예민한 내용이었던 만큼 풀어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원격수업 준비로 바쁘던 것이 좀 잦아들자 오늘을 디데이로 잡았나보다. 오전 내내 혼신의 힘을 다해 편지를 써 드디어 교장에게 보낸 것이다. 메일 보낸 지 얼마 안 돼 교장으로부터 긍정적인 답을 받았으니 묵은 스트레스가 한 번에 풀렸을 법도 하다. 아내는 내게 자랑스럽게 교장의 반응을 말했고 나는 진짜 잘 됐네, 라고 진심으로 기뻐했다. 다만 너무 열광적으로 맞장구를 치지 않는 것으로 아침에 내게 짜증을 낸 것에 대한 소심한 복수를 했다. 그래도 편지 쓰기를 도와주지 못한 것, 혼자 끙끙 앓게 내버려 둔 것은 미안하다.
아내는 스트레스가 풀린 것을 기념하듯 정원 구석으로 가서 가지치기에 몰두했다. 삼두박근이 후들거릴 정도로 육체노동을 한 아내와 테라스에서 식전주 와인잔을 부딪혔다. 우리는 포근해진 날씨를 본격적으로 즐기기 위해 테라스에다 정원용 탁자를 옮겨놓았다. 밖에서 식사하는 계절이 온 것이다. 오늘 엘리제궁은 격리 조치가 4월 15일 이후로 연장될 것이라면서 격리 일정에 관한 더 자세한 정보를 조만간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중증환자 증가세가 주춤해졌다. 어제 7천131명이던 것이 오늘은 단 17명 늘어난 7천148명이었다. 이전까지는 하루에 수 백 명씩 늘었었다. 중증환자의 수는 잠재적 사망자의 수이기도 하기 때문에 눈여겨봐야 할 수치이다. 이제 정점이어서, 내일부터는 중증환자 수가 줄어들고 솟기만 하던 확진자 그래프도 옆으로 눕길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