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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아 정씨 Apr 03. 2020

시간 때우기는 육체노동이 최고

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3

3월 18일(격리 3일째) 수요일 맑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타이핑을 하는 팔에 찌릿한 전류가 흐르는 듯 은근한 통증이 느껴진다. 아이들이 오전 공부를 하는 동안 어제 남겨둔 잔디를 깎으려 했으나 좀 더 말랐을 때 하지, 라는 아내의 말을 듣기로 했다. 원래 수요일은 오전 수업만 있는 날이어서 숙제의 양도 적었다. 둘째 아이의 숙제 리스트에는 아예 수요일 분량이 빠져 있었다. 콩세르바투아르에서 피아노를 배우는 첫째를 위해 음악 이론 수업 선생님이 메일을 보냈다.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을 듣고, 악기 별로 음계를 따라 부르기. 지난 시간에 나눠준 악보를 보고 하면 된다고 첫째가 설명했다. 그냥 음악만 듣고 음계를 따라 부르는 건 줄 알고 깜짝 놀랄 뻔했다. 시립으로 운영되는 콩세르바투아르에서 피아노를 배우려는 학생들이 많기 때문에 들어가는 게 쉽지 않은데 첫째는 운이 좋아 올해 들어가게 됐다. 시도 때도 없이 피아노 연습을 해대는 바람에 나머지 다섯 식구들의 귀가 살짝 피곤한 상태다. 


수요일은 오전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둘째가 테니스를 치러 간다. 물론 테니스장도 다 폐쇄돼서 갈 수가 없다. 수요일은 이전의 리듬대로 하더라도 교실 안 수업보다는 바깥 활동이 많은 날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어 붙인 사족이다. 수요일 오후에는 그래서 날씨가 허락한다면 인근 공원에 가거나 루아르 강변 산책로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여의치 않으면 그냥 산책로를 걷는다. 루아르 강변 산책로에서 보는 블루아의 외관은 썩 그럴듯하다. 봄 냄새가 짙어지는 요즘 같은 날씨에는 어김없이 루아르 강변을 갔을 텐데, 일상의 조그만 행복과도 같았던 일들을 하지 못하게 됐다. 이제 날씨가 따뜻해지면 그럴수록 더더욱 코로나 바이러스가 야속하게 느껴질 것이다. 루아르 강변을 따라 산책하는 수요일 오후의 소일거리가 이렇게 간절하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오늘은 아침부터 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전 내내 햇볕에 적당히 몸을 맡긴 잔디는 점심 이후에 잔디 깎기 기계를 돌려도 좋을 만큼 물기가 빠져 있었다. 어제는 가장자리를 예초기로 돌렸으니 이제 가운데 부분을 기계로 지나갈 차례다. 그런데 올 들어 처음으로 깎는 관계로 잔디-라기보다는 잡초에 가까운 풀들-의 키가 너무 자라 있었다. 과장을 아주 조금 하자면 30센티미터를 넘는 풀들이 있을 정도였다. 충전용 배터리로 전원을 공급하는 기계여서 힘이 달리는 단점이 있다. 풀들의 높이가 오늘처럼 과하게 길지 않을 경우 배터리 충전 한 번으로 정원 전체를 돌릴 수 있다. 오늘은 배터리 충전을 한 번 더 해서 두 번 돌린 뒤에야 잔디 깎기를 다 마칠 수 있었다. 아내와 셋째는 축구공에 바람을 넣고 미니 골대를 설치했다. 이렇게 했는데 아직 오후 3시도 안 됐다. 


화단 가꾸기는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 중 하나다. 육체노동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매우 단순한 원리가 그 안에 들어있다. 반대로 해석하자면 화단이나 정원이 제멋대로 방치돼 있는 것을 못 견뎌한다. 아내가 겨울을 싫어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이다. 아내가 겨울에게 안녕을 고하고 봄을 맞이하는 자기만의 의식이 바로 화단 가꾸기인 셈이다. 오늘은 여러 가지로 딱 떨어지는 날이다. 월계수 묘목 세 그루가 화분에 심어져 있었는데, 습한 겨울 동안 배수가 제대로 안 돼서 잎이 노랗게 변하고 있었다. 아내는 저거 화단에 옮겨 심어야 하는데, 를 꽤 오래전부터 입에 달고 있었다. 아이들도 떨이상품으로 구입한 장갑을 끼고 아내의 화단 가꾸기를 도왔다. 옮겨 심을 곳의 땅을 파고, 화분에서 들어낸 월계수를 심은 뒤, 비료 섞인 흙을 가져와 채우고, 물을 듬뿍 주고, 흙을 다지고... 잔디를 깎고 화단의 잡초를 뽑고 새 나무들을 심으니 정원에서 봄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개나리는 이미 풍성한 노란색을 띠었고 지난해 심었던 튤립이 어느새 봉오리를 피웠으며 체리나무에서도 꽃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의 화단 가꾸기가 마무리될 무렵, 나는 발코니로 눈을 돌렸다. 바깥 온도가 적당해지면 우리는 종종 발코니에서 식사를 하곤 한다. 겨울 동안 버려진 발코니는 불규칙한 바닥의 낮은 부분에서 고인 물 썩는 냄새가 날 정도로 지저분해져 있었다. 둘째를 불러 테라스까지 수도 호스를 당겨 왔다. 3평 정도 되는 테라스의 시커먼 바닥을 박박 닦았다. 둘째는 바닥의 색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가 닦으면, 둘째는 물로 쓸어냈다. 테라스를 끝내고 내친김에 정원으로 이어지는 계단까지 표백 작업을 했다. 청소 전과 후의 사진을 찍었어야 하는데, 라는 아쉬움과 원래 이런 색이었어, 라는 탄성을 뒤로하고 깔끔해진 테라스와 계단을 보며 뿌듯함을 만끽했다. 대신 후들거리는 팔을 얻었다. 독일에 사는 처제와 통화하며 오늘 일을 이야기하는 아내에게 처제는 남는 게 시간인데 뭐하러 힘들게 오늘 다 했대, 라고 말한다. 앗, 그런 방법도 있었군. 그러나 오늘 끝낸 덕분에 당장 내일부터 깔끔해진 정원에서 아이들과 공을 차거나 캐치볼을 할 수 있고, 깨끗한 테라스에서 애피타이저를 마실 수도 있게 됐다는 굳이 할 필요 없는 변명을 처제에게 해주었다. 


휴교령 3일째가 되자 숙제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부랴부랴 원격수업을 준비한 교사들이 진도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제 궤도를 찾는 모습이다. 특히 중학생인 첫째는 과목별로 해야 할 것들이 쌓여 가고 있는 중이다. 가정통신 사이트에서 학습자료들을 출력하면서, 그런 경우가 많지는 않겠지만 부모가 컴맹이거나 프린터기 따위가 없는 집들은 코로나 브레이크를 어떻게 헤쳐나갈까, 하는 생각을 했다. 별 영양가 없이 스친 내 생각을 첫째 아이와 나누면서 너희는 고마운 줄 알아, 같은 꼰대성 멘트는 날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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