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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아 정씨 Apr 04. 2020

집에 있어도 방학은 아니잖아

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4

3월 19일(격리 4일째) 목요일 맑음


우리나라가 한참 코로나 19 관련 뉴스를 쏟아내기 시작했을 때 아내는 이런 말을 했다. "너무 코로나 코로나 하면 더 불안한 거 아닌가?" 보도의 방향성은 제쳐두더라도 TV와 신문에서 다루는 양 자체가 많으면 바이러스가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한 실체적 진실을 알고 대처하려는 노력보다 겁을 먼저 먹게 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런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프랑스의 미디어 환경이 딱 한 달 전쯤 우리나라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매일 엄청나게 많은 양의 코로나 19 뉴스가 쏟아지고 있다. 오늘은 확진자 몇 명, 사망자 몇 명이 늘었다거나 이웃나라는 몇 명이라는 식의 경마식 보도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초유의 조치까지 내려진 마당이니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서 국민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인기 있는 기사의 주요 내용들을 살펴보면 독자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현재 프랑스인들의 관심은 코로나 19로 사망한 사람들의 숫자나 확진자 숫자가 아니라 아마도 초중고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위한 재택 수업일 것이다. 프랑스인 일반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를 포함한 아이들을 가진 내 주위 친구들의 관심사는 그렇다. 자는 시간을 최대한 늘려서 그 시간을 제외한다 하더라도 아이들과 하루에 최소한 12시간은 지내야 하는데, 문제는 현재의 시기가 방학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방학 때는 하루에 한 시간 정도 책을 펴고 공부하는 시늉만 해도 칭찬을 해줄 수 있지만 학기가 한창인 지금은 얘기가 다르다. 


코로나 19로 인해 휴교령이 내려진 기간 동안 여름방학을 늦추는 방안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지만, 휴가를 신(神)처럼 절대시 하는 프랑스인들에게 현실화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여름휴가를 늦추지 않기 위해서라도 학부모들은 아이들의 진도가 멈추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학교에 가서 배우는 것의 70~80 퍼센트 정도는 해줘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SNS에서 추천하는 기사들도 아이들과 하루 종일 알차게 보내는 방법, 집에서 효과적으로 공부하는 법, 재택수업을 돕는 인터넷 사이트 소개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렇게 훑고 지나가는 기사에서 힌트를 얻었다. 시간표를 활용하라. 그래 시간표를 만들자. 


원래 방학 때도 우리 집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밥을 먹고 학교에 가는 것처럼 옷을 입고 논다. 토요일이나 일요일도 마찬가지. 외출 일정이 없다고 해서 잠옷이나 트레이닝복 바람으로 하루 종일 지내는 법은 없다. 이런 생활 패턴이 휴교령으로 재택수업을 해야 하는 지금의 상황에 꽤나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상황에 맞는 옷을 입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겉모습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가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옛 어른들이 말하는 '목욕재계'도 비슷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평소와 같이 학교 가는 것처럼 옷을 입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닌데, 아이들을 설득해야 하는 것은 지금이 방학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시키는 일이었다. 학교를 안 가니까 방학이 아닌 것도 아니지만, 정확히 말하면 방학은 아니다. 여름휴가를 놓칠 수 없는 어른들의 입장에서는 지금이 방학 이어선 안 되는 것이다. 

슬기로운 격리생활 시간표

시간표<사진>를 그렸다. 오전 9시 30분부터 12시 30분까지 공부(중간에 15분 쉬는 시간)와 오후 14시부터 17시까지 공부(중간에 15분 쉬는 시간)가 시간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평소 학교에서 공부하는 패턴과 유사하게 정했다. 첫째는 시간표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입이 저만큼 나와 있었다. 선생님들이 내주는 숙제는 몇 시간이면 끝나는데 왜 6시간이나 공부를 해야 하냐고 강변을 했다. 나는 "너희들 방학이어서 집에 있는 것 아니다"라고 말해줬다. 학교의 권위에 기대 "학교에서도 이렇게 하길 원한다"라고 덧붙였다. 결국 내 말에 따르게 될 것을 나는 알고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꽤나 저항이 컸다. 새로 만든 시간표는 월화목금요일에 적용되는 것이고, 수요일은 오전 공부만 하면 된다.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아내도 동의했다.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은 아무래도 프랑스인들에게는 방학 때 시간표를 만들어 사용하는 문화가 없어서 낯설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할 따름이다. 그래도 동의한 것은 재택수업에 효과적일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첫째 말마따나 학교에서 주는 숙제의 양은 저 6시간을 채우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나머지 시간은 교사인 아내의 노하우와 각종 기사에서 추천하는 사이트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마음의 여유가 좀 생기면 미술이나 공작 수업, 과학 실험 등도 해볼 생각이다. 불평을 할 때는 쥐어박아주고 싶도록 밉지만 일단 수용하고 나서는 가장 적극적으로 따라주는 게 또 첫째이기도 하다. 아무리 미워도 마냥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첫째의 매력이다. 오늘은 오전에 학교에서 보내준 숙제를 모두 마치고, 오후에는 아내가 제시한 프로그램에 따라 역사 공부를 했다. 첫째와 둘째 모두 1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30분짜리 동영상을 보고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다. 동영상을 동원했으니 아이들도 싫어할 리가 없었다. 


아이들이 역사 공부를 하는 동안 나는 낮잠에서 깬 막내를 데리고 장을 보러 다녀왔다. 물론 사인이 선명한 증명서를 지참했다. 노트와 사인펜 등이 필요해서 대형마트로 갔다. 계산대 앞에서 생전 처음 보는 긴 줄을 서야 했던 그곳이 며칠 후인 오늘 어떻게 변했는지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기도 했다. 사재기에 번뜩거리는 눈들이 그렇게 많았던 매장 안은 평소 목요일 낮 시간과 다르지 않게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화장지 진열대는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상품들이 꽉꽉 채워져 있었고 진열대가 빈 곳은 딱 한 군데였다. 파스타와 스파게티 코너. 밀가루와 플레인 요구르트도 듬성듬성 빈 곳이 보였지만 스파게티처럼 싹쓸이해서 진열대가 깨끗해진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쯤이면 사재기가 별로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지 모른다. 사재기는 불안한 감정에 압도된 사람들의 너무나 인간적인 행동이지만, 모두를 불편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 불안을 조금만 걷어내고 초연해지기 위해 노력한다면 모두가 불편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아내의 생각도 비슷했다. “까짓 화장지 좀 없으면 어때, 손으로 닦고 물로 씻으면 되지. 지금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 많잖아.” 실제로 나에게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손으로 처리할지 아직 결정하지 않았지만,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서는 나쁘지 않은 정신승리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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