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5
3월 21일(격리 6일째) 토요일 흐림
아마 그 전날의 무리한 삽질과 잔디 깎기 등 정원 가꾸기 육체노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제는 도저히 키보드를 칠 힘이 없었다. 몸살 기운도 있어서 일기를 하루 패쓰하기로 했다. 처제 말이 맞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무리해서 한꺼번에 정원 일을 하기보다 조금씩 하면 몸도 덜 피곤하고 시간도 배분해서 활용할 수 있다는 그 조언 말이다. 그런데 조금씩 해서는 절대 끝을 보기 어려운 게 문제다. 그나마 이 정도로 정리를 했으니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정원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그러나 어쨌든 참고는 해야 할 조언인 것으로 정리하기로 했다.
토요일 오전은 셋째의 테니스 수업이 있다. 셋째가 테니스 수업을 하는 동안 첫째와 둘째,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은 코트 하나를 빌려서 따로 테니스를 한다. 3년째 테니스를 배우고 있는 둘째는 이제 공을 넘길 줄 아는 수준이고 어쭙잖은 나에게서 배운 첫째는 겨우 라켓에 공을 맞추는 수준이다. 나는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친 공을 주우러 다니면서 땀을 흘린다. 이렇게라도 운동을 하며 땀을 흘릴 수 있으니 행복한 일 아닌가, 하며 위안을 한다. 얼마 전 가깝게 지내는 친구와 테니스를 친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수준이 나보다 높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쳤는데, 마지막으로 그렇게 힘의 100%를 써서 테니스를 친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땀을 주룩주룩 흘릴 수 있어서 개운했다. 다만 몸이 예전 같지 않구나 하는 탄식을 낳게 했다. 모자란 실력은 발품으로 때웠다. 한 발 더 뛰면 잡을 수 있겠다 싶은 공은 무조건 뛰어가서 잡았더니, 그 친구가 “연습 조금만 더 하면 잘 치겠다”라고 칭찬해줬다. 남의 심장 터지는 줄은 몰랐을 것이다.
물론 셋째의 테니스는 취소됐다. 수업만 취소된 것이 아니라 코트 자체가 폐쇄됐다. 실외코트 6면, 실내코트 5면이 있는 꽤 규모 있는 클럽인데 운영을 당분간 하지 않는다는 안내 메일을 지난주에 받았었다. 휴교령 소식을 들었을 때 틈 나면 아이들이랑 테니스장에 가야겠다, 는 얼토당토않은 기대를 혼자 품은 적이 있다. 물론 자전거 나들이를 자주 가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던 그때가 그립다.
토요일 오후에는 첫째와 둘째가 종종 스카우트 활동을 한다. 첫째는 지난해부터, 둘째는 올해부터 스카우트 활동을 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또는 두 번 정도 주말의 반나절 동안 팀원들을 만난다. 가끔 1박 2일로 캠핑을 가는 경우가 있고, 여름방학 때는 스카우트 활동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일주일짜리 캠프를 떠난다. 8세에서 12세까지가 한 그룹이고, 13~17세, 18세 이상 등 크게 세 그룹으로 나뉜다. 우리 아이들이 속한 첫 번째 그룹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여름캠프를 떠나더라도 이 도시에서 30 킬로미터 이내의 장소에서 일주일이 최대치이고 그 이후 그룹들은 3주 이상 해외로 떠나기도 하다. 지난해부터 활동을 했던 첫째의 경우 1년 내내 열심히 활동을 했지만 정작 여름캠프는 한국에 오느라고 참가할 수가 없어 매우 서운해했다. 올여름은 우리 가족이 한국행을 포기했기에 여름캠프에 대한 기대가 높다. 만약 캠프마저 취소된다면 첫째의 실망은 이루 말로 하기 어렵겠지. 맨 위 조직은 하나여도 보이스카우트와 걸스카우트는 철저히 분리 운영된다. 정부의 격리조치 이후 스카우트 측에서도 메일을 보내와 아이들을 격려하고 있다. 어제 받은 보이스카우트 측 메일에는 수수께끼 풀기와 만들기 등이 적혀 있는 12쪽짜리 프린트물이 첨부돼 있었다. 어젯밤 출력해서 오늘 아침 둘째의 책상에 올려놓았더니 금세 뭔가를 만들어서 첫째, 셋째와 같이 놀고 있었다.
집에 TV가 없는 관계로 평소에는 뉴스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사는 편이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이 화재로 타고 있을 때에도 처가에 있던 첫째 아이가 TV에서 보고 깜짝 놀라 내게 전화를 해줘서 알게 됐다. 그래서 여기 살면서도 프랑스 소식은 한국 사람들이 아는 만큼 안다. 다만 때가 때인지라 요즘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우리 동네에 확진자가 몇 명인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그런데 정보가 우리나라처럼 친절하지 않다. 대충 몇 명인지만 나오고 정확한 도시나 지명은 공개를 안 하는 건지 내가 못 찾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오늘 현재 우리 데파르트망(도)에 확진자는 12명이 있는데 도청 소재지인 우리 도시에 몇 명인지는 밝히지 않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차피 나갈 수도 없으니 크게 상관은 없다. 그저 확진자가 많지 않은 동네인 건 맞나 보다, 할 뿐이다.
아이들과 24시간 지내고 있는 격리된 부모들의 걱정거리를 덜어주는 소식이 생겼다. 공영 방송 채널 하나를 통째로 교육에 할애하겠다는 것이다. 오락 채널인 프랑스 4는 다음 주 월요일부터 프로그램 전체를 초중고교생 학습 방송 체제로 전환한다고 밝혔다. 우리로 치면 EBS 쯤 되는 방송이 생기는 것이다. 휴교령이 지속되는 동안 운영될 것으로 보이는데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셋이나 되는 부모의 입장에서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오전 9시부터 한 시간 동안은 초등학교 저학년을 위한 불어(30분)와 수학(30분) 수업을 하고 중학생은 14시, 고등학생은 15시, 초등학교 고학년은 16시부터 한 시간씩 진행된다. 중간의 빈 시간에는 과학이나 역사 등 주제별 프로그램이 방영된다. 현직 공립학교 교사들이 수업에 참여한다. 중학생과 고등학생에 할애된 시간이 각 1시간씩 총 2시간이라는 게 좀 우습긴 하지만 EBS 같은 방송국의 존재를 모르는 프랑스인들이 이만큼 생각해냈다는 것이 가상할 따름이다. 하지만 이 희소식과 함께 드는 생각은 방송국의 전체 프로그램을 바꿀 정도로 대단한 변화라면 휴교령이 예상보다 더 길어지는 것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었다.
사실 나를 감싸고 있는 불안감은 코로나 바이러스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우선 내가 사는 지역은 워낙 확진자 수가 적어서 바이러스 감염이라는 게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뉴스 속 이야기쯤으로 느껴지는 면이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 코로나 19가 기승을 부렸을 때나 지금이나 그 바이러스에 대한 내 태도는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내 이동의 자유가 심각하게 제한되고 있다는 것이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게 만들 뿐이다. 이런 격리 조치가, 또 휴교령이 언제쯤 끝날 것인가에 대한 불안감이 내겐 더 현실적이다. 당장 돈벌이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개학 연기를 5주 넘게 했는데, 본격적으로 코로나 19에 온 사회가 대응하기 시작한 것이 2월이니까 사실 두 달가량 올 스톱된 것이다. 프랑스 사회가 본격적으로 움직인 시점을 지난주라고 치면 비정상적인 상황이 앞으로 두 달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휴교령 초기에 누군가는 2주 후에 다시 학교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나는 회의적이었다. 휴교령 발령 시점에서 4주 후면 2주짜리 봄방학(일명 부활절 방학)이 예정돼 있다. 아마도 휴교령 4주를 지속시키고 6주 동안 학교를 닫는 효과를 보려 하지 않을까, 라는 예상을 했다. 봄방학 이후에도 휴교령을 유지한다면 한국처럼 두 달 동안 학교를 닫는 셈이다. 하루 벌어먹고사는 우버 기사에게 두 달은 크다. 게다가 지난해 하반기 아내의 월급이 살짝 올라, 오른 양보다 큰 규모의 집세 보조금이 올 초부터 끊기는 참사가 발생했다. 며칠 전 봤던 월세 면제에 관한 기사를 더 찾아봤다. 그럼 그렇지, 주택용이 아니라 상점의 월세를 말하는 것이었다. 나와 같은 개인사업자를 위해 세금 납부 기한을 늦춰 주겠다는 내용도 있었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지금 내게 위협적인 것은 코로나 19가 아니라 이동제한 조치였다. 그 불안감을 없애줄 뭔가를 찾아야 할 숙제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