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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아 정씨 Apr 04. 2020

코로나 덕에 브리꼴라쥬

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7

3월 23일(격리 8일째) 월요일 맑음


‘사회적 거리 두고 온 가족이 자전거 타기’는 그냥 나만의 공상으로 끝날 가능성이 커졌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시도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정부가 다시 칼을 꺼내 든 게 아닐까. 더 강력한 조치를 발표한 것이다. 조치는 처음 등장했을 때보다 그 수위가 조금씩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 예를 들어 벌금만 해도 처음엔 38 유로였다가 135 유로로 올랐는데 이젠 상황에 따라 1500 유로까지 가능해졌다. 콧바람 좀 쐬려다 거널 나게 생겼다. 오늘자 정부 발표의 주요 내용은 전통시장 폐쇄, 운동을 포함한 외출은 혼자에 한해 하루 1차례, 최대 1시간, 집에서 1킬로미터 이내로 제한 등이다. 나는 집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최대한 오래 여럿이 갈려고 했으니 재수 없이 걸렸다가 벌금 1500 유로를 맞을 수도 있게 된다는 말이다. 그냥 자전거가 정 타고 싶으면 혼자 집 앞을 뱅뱅 도는 수밖에.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이들에게 자전거 타고 싶냐고 물었을 때 다들 시큰둥한 반응이었다는 사실이다. 마치 아이들을 위해 자전거 타기를 해야 할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내가 제일 바깥공기를 쐬고 싶었던 것이다. 


자전거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우리 집에서 바깥공기를 가장 자주 쐬는 사람은 나다. 장보는 일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월요일인 오늘은 장보는 날. 일주일 만에 동네 슈퍼가 아닌 대형마트를 찾았다. 이제 프랑스인들도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가기에 빠르게 적응하는 것으로 보였다. 지난주만 해도 어딘가 엉성한 대응이었는데 오늘은 체계가 잡혀가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사람들 역시 코로나의 위력을 인정하고 경각심을 키운 것 같았다. 뉴스를 통해 매일 수백 명씩 늘어나고 있는 확진자와 사망자 수를 보며 전보다 더 불안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쇼핑 카트의 예를 들어보자. 카트는 주차장의 주차 공간 중간중간에 놓여 있는데, 원래는 차에서 내린 다음 카트가 있는 곳으로 가서 동전을 넣고 카트를 꺼내 매장으로 향한다. 그런데 오늘은 주차장 내 카트 보관장소는 사용한 카트만 놓는 곳이라는 안내장이 붙었다. 즉, 다른 손님의 사용으로 방역이 필요한 카트이니 매장 입구에 놓여 있는 방역이 끝난 카트를 꺼내서 매장으로 들어가라는 말이다. 또 있다. 전에는 보기 힘들었던 마스크 인간들을 자주 마주치게 됐다. 다만 저 사람들은 저걸 어디에서 구했을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나를 포함한 매장 내 손님들은 각자의 거리에 신경을 쓰는 듯 보였다. 

창고에서 자고 있던 페인팅 도구들을 꺼냈다.


아내와 나는 격리생활을 이용해 평소에 못했던 집안 단장에 힘을 쏟기로 했다. 첫 번째 미션은 첫째 아이 방의 도배하기. 정확히 말하면 벽지 뜯어내고 페인트칠 새로 하기이다. 벌써 몇 달 전부터 아내가 노래를 불렀는데 내가 고개만 끄덕이고 행동에 옮기지 않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더 이상 거부할 명분이 없어졌다. 프랑스에서 집안일을 뚝딱뚝딱해내는 것을 브리꼴라쥬라고 하는데, 이것을 잘하는 사람은 굉장한 미덕을 가진 것으로 인정받는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손재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나, 많은 한국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브리콜라쥬를 해본 경험이 별로 없어서 여기 기준으로 절대 잘하는 사람은 아닌, 브리콜라쥬에 대해서는 무색무취한 인간이다. 재료만 있으면 침대도 만들고, 가구도 만드는 장인을 보아 온 아내의 눈에는 내가 아마 걸음마하는 갓난 아기 수준으로 보일 것이다. 


넷째가 태어나기 전 신생아 방의 벽을 새로 칠한 경험이 어렵게 동의한 이번 미션에서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이다. 1년 전 넷째가 지내게 될 방의 어둠침침한 보라색 벽지를 싹 뜯어내고 흰색으로 칠했다. 혼자 깨닫는다는 것은 매우 지난한 일이다. 시행착오는 딱 그만큼의 시간을 뒤로 돌려놓는다. 누군가에게 배웠다면 돌아가지 않아도 될 길이라는 생각에 아주 잠깐이지만 분노 비슷한 것도 치밀어 오른다. 처음부터 다시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긴 하지만 덕분에 각인효과가 남는다. 넷째 방 벽을 새로 칠하면서 배운 것은 본격적으로 색을 칠하기 전 벽을 고르게 만드는 일이 페인트칠 전체 과정 중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첫째의 의견을 적극 수용해 이번 미션에서는 흰색과 민트색의 투톤을 사용하기로 했다. 이 도시 인근에는 브리콜라쥬 전문 매장의 수가 꽤 많은데 이동제한 조치 이후로 모두 휴점 상태여서 대형 마트에서 구입했다. 


아내는 첫째와 함께 어제 오후부터 벽지 뜯기 작업을 이미 시작한 상태였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셈이다. 어제 둘이서 3분의 1 정도를 뜯었고, 오늘부터 내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벽지는 상당히 두꺼웠는데 중화제 섞은 물을 아무리 발라도 한 번에는 절대로 벗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벽지가 떨어져 나간 벽의 상태를 보니 왜 벽지를 사용했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벽이 전반적으로 고르지 않고 금이 가거나 훼손된 곳이 꽤 많았다. 그런 곳에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고 그냥 바를 경우 새로 칠한 페인트가 그대로 다시 떨어져 나오기 때문이다. 지난해 막내 방의 벽을 칠하면서 얻은 교훈이다. 아내가 그렇게 해라, 해라 할 때는 하기 싫었는데 막상 벽지를 뜯다 보니 전투력 상승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에는 처제의 조언을 참고해서 천천히 할 생각이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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