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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퍼거북 Aug 19. 2020

하와이 Day 7

폴롤루 밸리: 날이 좋지 않아서, 유명하지 않아서, 더 특별했던 곳

2018.8.4.(토)     


호노카아(Honokaa) 텍스 드라이브 인(Tex Drive In) - 호노카아 시민극장(Honokaa People’s Theater)  -와이피오 밸리 전망대(Waipio Valley Lookout) - 하와이안 스타일 까페(Hawaiian Style Cafe) - 폴롤루 밸리(Pololu Valley ) - 하푸나 비치(Hapuna Beach State Park) - 퀸즈마켓(Queens Marketplace)


기적이 일어났다. 아침에 일어나서 집 앞을 보니 활활 타오르던 빨강이 사라지고 까만 재와 노란 덤불만 남았다. 아직 빨래가 날아갈 정도로 바람이 강하고, 바람에 매캐한 탄 내가 남아있기는 했지만, 우리는 원래 계획했던 일정을 실행할 수 있었다. 커다란 부엌에서 밥을 했다. 전기밥솥이 아닌 냄비에 밥하는 건 한국에서는 굉장히 어렵고 실패 확률이 큰 일이었는데, 미국 쌀 포장지 뒷면에 적혀있던 밥하는 법은 단순하기 그지없어 의심이 갔지만 그대로 따라 하면 의외로 매번 밥맛이 좋았다. 어제 사 온 된장국을 끓이고 계란과 소시지, 샐러드를 곁들여 우리 아침은 진수성찬이 되었다.

bush fire로 밤사이 까맣게 탔다.

비가 미친 듯이 쏟아졌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짱 개는 정글 같은 숲길을 지나 호노카아 텍스 인 드라이브 핫 말라사다를 먹으러 갔다. 호노카아는 와이피오 계곡을 보기 위해 찾는 작은 마을이다. 사실 도넛이 특별히 맛있지는 않았지만 ‘핫’ 말라사다와 커피는 비 오는 날과 찰떡궁합이었다. ‘우리가 이 빗길을 뚫고 널 만나러 이까지 왔어.’하는 특별함이 더해졌다. 


동네가 미국 서부영화 속 세트장 같았다. 호노카아 시민극장은 영화 호노카아 보이에서 주인공이 일하던 극장으로 나왔고, 실제로 영화도 상영하는 곳이었다. 시민극장 주변 건물들의 벽 색깔이 너무 이뻤다. 건물을 지을 때 나는 민트로 할 테니 맞은편 너는 옐로로 해! 하고 상의하고 칠하지 않았을 텐데 어쩜 이리 조화로울까! 머릿속에 색들을 저장했다. 저 따뜻한 민트색은 싱크대 색깔로 쓰고 싶다. 저 세련된 자주색은 거실장 포인트로 어떨까? 우리 집으로 가만히 색을 옮겨와 본다.  

날이 흐리고 안개도 있어 운치가 있었지만, 쨍한 날의 이 곳은 어떤 느낌일지도 궁금했다. 애들은 빨리 차 타고 가자고 난리인데, 엄마는 이렇게 마냥 동네를 걷는 것도 좋다. 오늘이 쉬는 요일이라 문을 닫은 건지, 영업을 접은 것인지 알 수 없는 미용실에서 과감하게 머리도 잘라보고 싶었다. 

호노카아 시민 극장

와이피오 밸리는 가기 전에 알아보니,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한 곳이었다. ‘굳이 그까지 안 가도 된다, 가서 전망대에서만 볼 거면 별거 없고 그렇다고 사륜 타고 내려가면 너무 힘들다.’는 의견과 ‘전망대에서만 보더라도 장관이니 꼭 가보라.’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두구두구두! 나의 의견은? 차를 대고 룩아웃으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말 그대로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좁은 계단 길 입구에서 거대한 섬이 보였다. 사진으로는 가늠해볼 수 없었던 웅장함! 눈을 살짝 돌렸을 뿐인데 마주하게 된 자연은 과히 압도적이었다. 투어나 하이킹을 하지는 않았지만 전망대에서 볼 수 있는 이 장관을 놓쳤다면 너무 아쉬울 뻔했다. 누가 와이피오밸리를 추천하냐고 물어보면, ‘나라면 꼭 갈 거야.’라고 말해줘야지. 

와이피오 밸리 전망대(룩아웃)

점심은 하와이안 스타일 카페로 갔다. 대기가 길고 화장실은 붐볐지만, 뭔가 로컬 느낌이 나면서 편안했다. 나이가 많은 친절한 웨이트리스 언니가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큰, 내가 좋아하는 코코넛 크림이 뿌려진 핫케이크를 먹었다. 옆 테이블 아이는 크림이 스마일 모양으로 뿌려져서 나왔고, 나는 토끼 모양으로 나왔다. 별 기대 없이 시켰던 깔루아(통째로 구운 돼지고기를 잘게 찢은 요리)도 부드럽고 맛있었다. 나중에 계산서에 보니 ‘셰어차지(share charge)’라는 게 있었다. 셰어차지에 대해 물어보니 1인 1식사를 시키지 않을 땐 셰어차지를 부과한다고 했다. 양이 많고 싸기로 유명한 식당이어서 우리 4인 가족도 2개만 시켰고, 사실 이것도 많아서 핫케잌의 반은 남겨서 테이크아웃했다. 결국 그 남은 핫케이크는 뜨거운 차 안에서 사람이 먹지는 못할 상태가 되어 다음 날 칼스미스 비치의 물고기 밥이 되었다. 

하와이안 스타일 카페: 토끼 모양 핫케이크

하와이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 중에 하나가 팁 문화이다. 팁을 어느 정도 줘야 하는지, 물가 비싼 하와이에서 15%, 18%, 20%로 권장되는 팁 금액은, 언제나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영수증에 권장 금액이 같이 나오는데 마음 같아선 언제나 20%를 내고 싶지만 15%로 체크하고 나올 땐 미안해서 도망치듯 나오곤 했다. 현금결제만 가능한 이 식당에서 우리는 잔돈이 없었다. 언니가 친절했기 때문에 더 난감했다. 동전까지 탈탈 털어서 15% 팁이 겨우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하와이안 카페 웨이트리스 언니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해주신다. 팁을 많이 못 준 것에 대해 속으로 ‘언니가 친절하긴 했는데 너무 느렸어. 오래 기다렸어. 이해할 거야.’하며 아무도 안 물어봤는데 변명하느라 바빴던 내 마음도 같이 밝아졌다. 


오후엔 폴롤루 룩아웃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구름이 재생속도*3으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선팅 입혀진, 달리는 차 안에서만 볼 수가 없었다. 차를 한 곳에 세우고 똥꼬1호가 구름 동영상을 찍었다. 구름 보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구나. 

구름 찍는 똥꼬1호

하지만 다시 차에 타자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고,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안개 길이 이어졌다. 폴롤루 룩아웃은 차에서 못 나가고 점만 찍고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폴롤루는 와이피오보다 알려지지 않은 다소 생소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에게는 더 보물 같은 곳이 되었다. 도착하자마자 비가 쏟아져서, 좀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나갔다. 비가 오락가락했지만, 이제 이쯤의 비는 비도 아니다. 우비는 거추장스러워서 벗어던졌다. 입구부터 비로 질척해진 땅이 경사까지 있어서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미끄러졌다. 나도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디딜 곳을 찾아 움직였다. 너무 위험했다. 아이들이 걱정이었다. 


그런데 어떤 아기 엄마가 쪼리를 신고, 6개월이나 겨우 됐을까 싶은 아기를 한쪽 옆구리에 아기띠도 없이 끼고 활짝 웃으며 올라오고 있는 게 아닌가. 아기 엄마가 먼저 웃으며 “하이” 했다. 그 환한 웃음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하이”라는 짧은 말 안에 ‘30분만 가면 돼요. 저 아래 말도 못 할 멋진 풍경이 기다리고 있어요, 저는 아기도 데리고 갔다 왔어요. 할 수 있어요.’라는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등산을 자주 해보지는 않았지만, 아이들과 산을 오르다 보면 맞은편에서 내려오는 사람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었다. 사람들이 지치고 힘들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 자동적으로 위로 올라갈수록 더 힘들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지레 겁을 먹게 된다. 반면 활짝 웃으며 ‘어머, 애들이 이까지 왔네. 정말 대단하다. 이제 거의 다 왔어. 조금만 힘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올라가 보면 ‘이제 거의 다 왔어.’는 거짓말일 때가 많지만, 그 말과 표정에서 얼마나 큰 힘을 얻게 되는지 모른다. 


미끄러질 뻔한 위기를 몇 번이나 가까스로 넘겼다. 아이들을 도와주려던 엄마는 오히려 아이들의 짐이 되었다. 제일 꼴찌로 헉헉대고 따라가며, 아이들이 먼저 밟고 ‘엄마, 여기 밟고 와.’ 인도하는 길로 갔다. 그래서, 이 날 사진은 온통 세 남자의 뒷모습이다. 그러고 보니 어디를 걷기만 하면 내 핸드폰에 남는 사진들은 세 남자들의 뒷모습이다. 남편이 뒤돌아보며 ‘벌써부터 꼴찌라서 큰일 났네.’ 한다. 확 긴장이 된다. 건강해서, 넉넉해서, 더 오래 아이들에게 많이 주는 사람이고 싶다. 음.. 쓰고 보니 더 많이 준 적이 있기는 했던가 싶다.  

    

폴롤루 밸리 내려가는 길: 엄마는 꼴찌

내려가는 길은 말이 30분이지 비가 오락가락하고 위기가 많아서 암벽등반하는 것처럼 힘이 들었다. 


드디어 도착한 평지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바다와 강이 이어져서 왼쪽은 바다, 오른쪽은 강이었다. 왼쪽으로 성난 파도의 바다가 있었고, 오른쪽 뒤로는 강을 둘러싸고 잔잔하고 평온한 풍경이었다. 폭우가 막 쏟아져서 어디로 대피해야 하나 싶어 숲으로 살짝 숨으면, 어느새 해가 쨍하고 나왔다. 숨바꼭질하는 것 같았다. 

폴롤루 밸리: 왼쪽 바다와 오른쪽 강이 이렇다할 경계도 없이 이어졌다.

십 대 아이들이 불어난 바다에 웃통을 벗고 들어가서 수영하고 있었다. 이쪽 땅에서 맞은 편 땅으로 건너가려면 2m 남짓한 바다를 건너야 하는데, 물이 불어나서 건너갔던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안 젖고 돌아오려고 한참을 저 편에서 기다리던 부부가 있었는데, 결국 한 번 크게 물에 빠져 운동화도 바지도 다 젖은 채로 건너왔다. 그 부부가 방법을 찾아내면 나도 따라 건너가 보고 싶었은데, 아쉬웠다. 근데 그 순간 웃통 벗고 놀던 십 대 아이들이 큰 돌을 옮겨서 징검다리를 만드는 게 아닌가! 이런 창의적이고, 문제해결력이 뛰어나며, 이타적인 아이들이라니! 재미있게 놀다 보면 이런 아이디어가 생기나 보다. 많이 마음껏 놀다 보면 이렇게 되나 보다. 


언제 비를 확 뿌릴지, 해가 쨍 날지 예측 불가한 변덕쟁이 날씨 때문에 숲에 숨었다가, 바다에 살짝 발을 담갔다가 하며 폴롤루는 우리에게 더 특별한 곳이 되었다. 와이피오가 ‘보기만 해도’ 좋은 곳이었다면, 폴롤로는 ‘밟고 만져봐서’ 더 좋은 곳이었다. 올라오는 길은 훨씬 수월했다. 


입구에서 한국인 신혼부부가 밑에 어떠냐고 물어봤다. 너~무 좋은데 슬리퍼 신고 가면 위험할 것 같다고 얘기해줬다. 사실 너~무 좋아서 신발 구해서 다시 오라고 하고 싶었다. 여기 위에서만 보고 가면 너~무 아까운데! 


비와 땀이 섞여 우리 옷에서는 참을 수 없는 냄새가 났고, 옷을 벗자 차에서도 참을 수 없는 냄새가 났다. 애들은 갈아입을 옷이 없어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폴롤루에서 어떤 외국인이 팜스탠드에서 한 시간이 넘게 놀다 와서 늦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팜스탠드가 어딜까 궁금했다. 내려오는 길 오른쪽에 말들이 평화롭게 풀 뜯고 있는 초원이 보였다. 그곳이 팜스탠드였다. 하늘과 풀밭과 말밖에 없는 넓고 넓은 초원에 화장실 하나와 트럭 카페테리아가 있었다. 여기서 어찌 뭘 안 먹을 수가 있을까? 여기서 어찌 안 뛰어다닐 수가 있을까? 사진기를 꺼내 들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래서 애들은 냄새를 풀풀 풍기며 또다시 슈퍼맨처럼 뛰어다녔고, 하와이에서 첫 셰이브아이스를 추워서 덜덜 떨며 먹었고 (주문을 잘못 시켜서 우리가 기대하던 레인보우 색이 아니라 노란 단색 파인애플맛 셰이브아이스가 나왔다), 나는 연신 셔터를 눌렀다. 

팜스탠드

폴롤루에서 멀어질수록 날씨가 좋아졌다. 그리고 처음! 하와이 무지개를 봤다. 셰이브아이스에서 못 본 무지개가 하늘에 통통하게 푸근하게 솜사탕처럼 떠 있었다. 우리는 다 같이 함성을 지르고, 차를 갓길에 세우고 또 연신 셔터를 눌렀다. 한국에서도 무지개를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통통하고 맛있어 보이는 무지개는 처음이다. 

무지개야 반가워. 너 너무 달콤하게 생겼다.

하와이 첫 무지개

많이 늦은 시간이었지만, 우린 파장 분위기의 하푸나 비치로 갔다. 아름다운 석양을 보며 바디보드를 즐겼다. 나는 첫날 파도에 거꾸로 꽂히는 사고 이후 바디보드 공포증이 생겨 파도가 조금만 거세 보이면 주저하게 된다. 왕년에 해운대에서 파도 좀 타던 여자라고 말해도 남편이 안 믿는다. 

하푸나 비치: 석양은 시작하면 끝을 봐야 집에 간다.

저녁이 또 늦어졌다. 이번엔 퀸즈마켓에 들려서 나 혼자 마트로 들어가 어제 점찍어둔 고기 장을 보고 숙소로 갔다. 시간이 많이 늦고, 바람이 여전히 세게 불어서 우리의 로망이자, 이 숙소를 택한 큰 이유 중에 하나였던 야외 바비큐 그릴은 포기하기로 했다. 아이들이 이해해줘서 다행이었다. 그리하여 집에서 아빠표 스테이크 굽기가 시작되었다. 타이머를 맞춰놓고 기름을 마구잡이로 써서 뒤집고, 또 뒤집고, 또 뒤집어 굽는 방식이다. 이 레시피의 포인트는 타이머가 기름 범벅이 되도록 여러 번 구워야 한다는 거다. 너~무 맛있었다. 아빠곰 최고! 하와이에서 먹었던 음식 중에, 나한텐 최고였다. 가성비 좋다는 맛집도, 비싼 레스토랑도, 전망 최고라는 식당도 남편이 다 이겼다. 

또 해주세요.!!!! 

어젯밤에 밖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도 꺼지고, 고기는 입에서 살살 녹고, 오늘 밤에는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겠다. 어제는 감히 꿈도 못 꿔본 하루가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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