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로의 마지막 밤
2018.8.8.(수)
빅아일랜드 캔디스(Big Island Candies)-수이산(Suisan) 점심-릴리우오칼라니 공원(Liliuokalani Park and Garden, 일본풍 정원)-힐로 파머스마켓(Hilo Farmers Market)-파인애플 섁 (Pineapple Shack)- 힐로 시내 거닐기-숙소 수영장-숙소 앞 호수-재키 레이즈(Jackie Rey's) 저녁
아침은 라면과 햇반이었다. 호텔에 공용 전자레인지실 하나가 있어서 열쇠를 받아 우당탕탕 요란스럽게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며 햇반을 데우고 뜨거운 물을 받아 아침을 먹었다. 역시 여행지에서는 라면이 최고다. 촌스러운데 어쩔 수 없다. 믹스와 라면. 나의 여행 필수품이다. 빅아일랜드 캔디스라는 유명한 쿠키 팩토리에 가서 일본 사람들의 극진하고도 편안한 서비스를 받으며 시식을 했다. 시식용 작은 종이컵 커피가 쿠키를 부르고, 쿠키가 또 커피를 부르고... 쿠키와 커피 좋아하는 친정엄마한테 선물할 쿠키를 고르느라 이 쿠키 먹고, 저 쿠키 먹고, 이 쿠키가 어떤 맛이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서 다시 한번 또 먹었다. 온몸이 달콤해졌다.
포케 포장 전문점 수이산에서 칠리와 아보카도 포케를 샀다. 야외에서 먹을 생각이었는데 오락가락하던 비가 꽤 길게 폭우처럼 쏟아졌다. 결국 차 안에서 먹었다. 비 소리를 들으며, 도시락이 쏟아질까 조심스레 펼쳐놓고 파인애플 깍두기와 같이 먹는 포케 맛이 일품이었다.
비가 좀 그치고 바로 앞에 있는 릴리우오칼라니 공원에 갔다. 비 맞고 더 푸르러진, 산뜻한 초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여유 있게 걸었다.
오늘 유일하게 미리 계획한 일정은 힐로 파머스마켓에 가서 먹고 싶은 과일 실컷 먹기였는데, 두 번이나 갔지만 비 때문에 마켓이 열리지 않았다. 엉엉. 매주 수요일, 토요일에만 열리는 장이었다. 마트에서 비싼 과일값에 갈등이 될 때마다 힐로 파머스마켓에 가면 싸고 신선하게 먹을 수 있다고 오늘로 미뤄두었었다. 우리에겐 내일 오아후섬으로 이동하면 다시없을 장날인데, 수공예품도 판다길래 이쁜 액세서리나 하와이스러운 소품을 보면 신나게 지갑을 열어보려고 했는데 너무 아쉬웠다. 오아후에 가니 없는 과일도 많고, 배로 비쌌다. 내내 아쉬웠다. 다시 빅아일랜드를 가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생겼다.
어제 파인애플즈에서 통파인애플 주스에 대한 나의 아쉬움을 달래러 파인애플섁에 갔다. 남편은 어제부터 큰 그림이 있었다. 파인애플 주스 전문점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파인애플섁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파인애플섁은 소품부터 메뉴까지 온통 파인애플인 곳이었다. 모든 음료가 통파인애플에 담겨 나왔다. 야호. 사랑스러운 아이의 사진과 그 아이의 시선으로 본 엄마 아빠의 파인애플섁 창업스토리가 벽면에 붙어있었다. 한참을 서서 재미있게 읽었다. 나만의 파인애플 음료를 주문하는 방식이라 침 튀기는 가족회의를 거쳐 맛을 고르고, 토핑을 선택했다. 드디어 먹어보는구나! 하고 토핑 추가에 욕심을 냈더니 차고 넘치도록 풍성한 음료가 나왔다. 그런데 무슨 맛 아이스크림을 추가할까 한참을 고민하다 선택한 그 아이스크림 토핑이 보이지 않았다. 밑에 숨어있나 보다 하고 계속 파내려갔는데 파인애플 노란 밑바닥이 나오도록 보이지 않았다. 카운터로 가서 아이스크림이 없었다고 얘기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러면 아이스크림을 따로 주면 되겠냐고 했다. 나는 파인애플 위에 볼록 솟아있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었던 거지, 그릇에 따로 담긴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니라고 추가된 아이스크림 토핑 값만 돌려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표정이 굳어져서 주방 안에 있던 주문받은 스탭을 불렀다. 그 스탭도 ‘그러니까 지금 따로 줄게요.’ 하고 짜증 난다는 듯이 얘기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그 점원들은 파인애플섁의 사랑스러운 딸이 이 가게의 가족 같은 스탭이라고 소개했던 벽면 속 사진에 있는 언니들이었다. 저 사랑스럽고 감동적인 창업스토리에 이런 서비스라니! 저 언니들이 이 언니들이라니! 파인애플과 무지개가 가득한 가게에서 맛있는 파인애플 주스를 먹고 소원 성취한 기분이었는데 찬물을 확 끼얹은 기분이었다.
근데 이때, 옆에서 한국말이 들렸다. ‘그러니까 그릇에 아이스크림을 따로 준다고 하잖아요.’ 일행과 영어와 한국말을 섞어서 얘기하고, 한국말이 서툰 걸로 봐서 교포인 듯했다. 내가 영어를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해서 도와주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말투에 ‘진상 한국 손님’을 한심해하는 것이 확 느껴졌다. 이전까지는 스태프들한테 화가 났었는데, 이 사람 말에는 확 눈물이 날 뻔했다. 이게 따로 나올 게 아니라 토핑으로 파인애플에 같이 나왔어야 하는 거라고 교포한테 한국말로 설명하고, 카운터 언니들한테는 다시 영어로 설명했다. 내가 상황 파악을 못하는 게 아니고, 영어를 못 알아듣는 게 아니라는 걸 이 교포한테 보여줘야 했다. 교포가 ‘아’ 했다.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릇에 달라고 했다. 화와 서러움이 가라앉지 않아 가슴이 계속 방망이질했다. 우리 가족은 대화 없이 그릇에 따로 나온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그 교포는 외모만 한국인이고 뼛속까지 미국인일 수도 있겠다. 스태프들 때문에 내 귀가 예민해져 있어서 교포의 말투가 불친절하게 느껴진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낯선 타국에서, 같은 언어를 쓰는 것만으로도 반가울 수 있는 교포인데, 우리 편한테 비난받은 것 같았다. 우리 편이 우리 편이 아니었다.
파인애플섁을 나와서 힐로 거리를 거닐다 숙소로 돌아왔다. 똥꼬1호 귀가 안 좋아서 오늘은 수영을 안 했으면 했는데 애들이 힐로 마지막 밤이라고 수영을 꼭 해야 한다고 했다. 다이빙을 심하게 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세 남자가 수영장으로 갔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나를 위한 남편의 배려이기도 했다. 놀다 쓰러져 자는 날이 대부분이라 가계부 쓸 시간, 일기 쓸 시간이 없다. (나는 이전에는 가계부도, 일기도 안 쓰던 사람인 것은 안 비밀이다. 하하)
오늘은 파인애플섁 사건으로 마음이 피곤해져서 커피 한 잔 하며 조용히 있을 시간이 절실했다. 미타임을 잘 보내고, 나도 마지막 수영을 즐기러 나가려는데 남편이 달려왔다. 수영장 바닥에 이상한 게 있는데 아무래도 똥인 거 같다는 거다. 갈색 물체가 수영장 바닥에 있어서 나뭇잎인 줄 알고 꺼내려고 집었는데 손에서 바스러졌단다. 그리고 냄새도 났다고 했다. 카운터로 달려가서 수영장에 똥 같은 게 있다고 말했다. 내가 듣고 싶었던 대답, 기대했던 대답은 '그럴 리가 없다, 아닐 거다.' 였는데 카운터 언니 얼굴이 심각해졌다. 사람을 보내서 바로 확인해본다고 했다. 수영장으로 갔더니 우리 애들이랑 우리 애들 또래 여자애 두 명이 신나게 놀고 있었다. 아저씨가 뜰채를 가지고 와서 갈색 물체를 건져냈다. 건져내자마자 두둥! 수영장을 폐쇄해야 한다고 했다. 똥이 확실해 보인다는 거다. 애들이 아쉬워하며 수영장을 나왔다. 똥 사건만 아니었으면 내일 아침에도 한바탕 수영을 하고 체크아웃하는 건데 아쉬웠다. 우리가 체크아웃할 때까지 수영장은 “closed” 상태였다. 아쉽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호텔 수영장에 똥이라니! 더티하지만 잊지 못할 추억 하나가 또 생겼다.
생각보다 일찍 수영이 끝나서 아이들은 집(호텔보다는 이제 집처럼 느껴진다) 앞 호수에 낚시를 하러 가기로 했다. 남편이 미션 하나를 주고 갔다. 오늘 저녁 힐로에서, 아니 빅아일랜드에서의 마지막 저녁 만찬을 어디서 할지 결정할 것! 포하(포에버 하와이) 카페와 트립어드바이저 앱과 블로그를 들락날락하며 레스토랑을 알아봤다. 많이 추천하는 파인애플즈와 카페 페스토 찬스는 벌써 써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을 위해 남겨둘 걸. 어디는 터무니없이 비싸서, 어디는 분위기가 영 아니라서, 어디는 후기가 너무 없어서 고르기가 어려웠다. 아까 수이산 갔을 때 옆에 ‘저기가 어디야? 카페야? 호텔이야? 멋지다.’ 했던 그 레스토랑으로 정했다. 극찬하는 후기글을 읽었고, 분위기는 바깥에서 이긴 하지만 확인했고,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에 있었다. 그래! 결정했어!
멈춘 듯했던 비가 다시 쏟아지기 시작해서 우산과 우비를 들고 세 남자를 찾으러 나갔다. 결국 못 만나고 한참을 헤매다 나 혼자 돌아왔고, 잠시 후 애들은 비에 홀딱 젖어 돌아왔다. 세 남자는 물고기를 낚지는 못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거북이와 오리가족을 만나고 흥분해있었다.
남편에게 이 식당으로 가자고 했다. 남편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거기 말고 재키스 레이에 가자고 했다. 남편은 먹는 것에 대해서는 주관이 뚜렷하고 미식가이다. 나는 보통 남편의 의견을 따르고 만족하는 편이고, 음식뿐 아니라 무엇인가를 고르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이다. 2시간을 검색해서 결정한 곳인데 남편이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다른 곳을 얘기했다. 이럴 거면 왜 물어봤냐고 화를 벌컥 냈다. 어제의 통파인애플 주스는 아쉬움 정도였다면 이번엔 비슷한 사건이 연속으로 더 센 강도로 터져서 서러움이 폭발했다. 분위기가 싸해졌다. 뭐라고 변명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남편도 말이 없었다. 더 화가 났다. ‘자기도 화가 난 거야? 왜? 내가 뭘 잘못한 거야? 나는 뭐 먹고 싶은 것도 없는 사람인 줄 알아? 가고 싶은데도 없는 사람인 줄 알아?’ 속으로 계속 씩씩대고 있었다. 씩씩댐이 까딱하면 범람할 기세로 수위를 높이고 있었다. 마지막 날 잘 먹어보려고 했던 만찬이 이리되니 빅아일랜드가, 하와이가 통째로 기우는 것 같았다. 아이들까지 모두가 침묵 속에 재키스 레이 주차장에 도착했다. 남편이 한참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한참만에 입을 떼더니, ‘색시가 그렇게 느낄지 몰랐어. 정말 미안해.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데, 무시한 거 아니야.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 있었겠다. 너무 미안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하면서 우는 게 아닌가. 나도 눈물이 났다. 남편은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몰랐고, 나는 남편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 10초 전까지만 해도 이번엔 나도 그냥 못 넘어가 하고 칼과 방패를 들고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는데 바로 무장해제됐다. 눈물의 화해를 하고 차 밖으로 나왔는데 식당 바로 앞에 엽서 같은 석양이 펼쳐져 있었다. 잘했다고 토닥여주는, 이렇게 금방 풀어져도 되나 하고 자존심으로 살짝 남겨두고 있던 어색함도 날려주는 석양이었다. 길에 서서 우와 우와 하며 사진을 찰칵찰칵 찍었다.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도 우리의 시선이, 우리의 핸드폰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서 나는 다시 한번 무장해제됐다. 너무 맛있는 게 아닌가! 폭찹 치즈버거와 클램차우더가 입에서 살살 녹았다. ‘가성비 맛은 그저 그러네?’ 하고 한 번 톡 쏘아주고 씩 웃을라 했는데, 속도 없이 진짜 맛있다를 연발하며 허겁지겁 먹어버렸다. 빅아일랜드에서의 마지막 날 밤은 딱 마지막 날 같았다. 피처링(featuring) 석양, 재키 레이즈의 음식에 감사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