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용암을 보다
2018.8.7.(화)
카와모토(Kawamoto Store) - 사파리 헬리콥터(Safari Helicopters: Hilo, Deluxe Vocano Safari) - 4마일 시닉 드라이브(4-Mile Scenic Drive)- 아카카 폭포(Akaka Falls State Parks) – 칼스미스 비치(Carlsmith Beach Park) – 숙소 수영장 – 파인애플즈(Pineapples)
빅아일랜드에서 꼭 하고 싶었던 것 중에 하나가 화산 보기였다. 사실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살아있는 화산을 직접 보고 밟는데, 빨간 용암을 보고 뜨거운 수증기를 느낀다는데, 이게 안전하게 할 수 있는 것인지. 눈에 잘 그려지지 않아 더 경험하고 싶었다.
우리가 출발하기 전 세 달 전에 빅아일랜드 화산이 크게 폭발했다. 2018년 5월 4일, 빅아일랜드 킬라우에아 화산 인근 지역에서 43년 만에 규모 6.9의 지진이 발생하면서 킬라우에아가 폭발했다. 용암이 흘렀고 동쪽 해안 지역 가옥 수십 채가 파손되고 주민 대피령이 내려졌다. 화산공원은 폐쇄됐다.
하와이 여행이 계획되어있다는 걸 아는 몇 안 되는 사람들한테 연락이 왔다. “못 가는 거 아니야?” “딴 섬으로 가야지 거긴 안 되겠네.” 화산공원이 제일 좋았다는 사람이 많았는데,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웠다. 마우이섬으로 바꿔야 하나? 이미 예약한 항공이랑 숙소는 어떻게 하지? 현실감각이 있으면서도 긍정적인, 내가 보기엔 아주 신비한 능력을 지닌 우리 남편은 5월에 터졌으니까 다 분출되고 3개월 뒤 우리가 여행 갈 때쯤에는 잠잠해져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여행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하와이 화산은 분출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남편이 조금 심각해졌다.
화산공원 숙소는 예약을 취소했다. 하루에도 하와이 카페를 몇 번씩 들락날락하며 빅아일랜드 상황을 확인했다. 빅아일랜드가 이름처럼 엄청 넓은 곳이라 화산 폭발을 전혀 못 느끼겠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빅아일랜드 숙소를 취소할 수 있는 기한이 얼마 안 남았을 때 우리는 화산재 때문에 미세먼지가 심해졌다는 얘기를 듣고, 3일 동안 빅아일랜드 미세먼지 수치를 살핀 후에 다른 섬(마우이)으로 다시 예약할지를 결정하기로 했다. 한국에서의 미세먼지도 속상한데 하와이까지 가서 미세먼지 수치를 확인하고 마스크를 쓰고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가 세운 기준이었지만 그즈음에 빨간 막대기가 자주 보여서 사실 빅아일랜드를 강행하기는 어려워보였다. 그런데 우리가 정한 3일 동안 미세먼지는 노랬다가 오렌지가 되기는 했지만 빨개지지는 않았다. 가기로 결정했다. 뒤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항공과 숙소는 확정이니 이제 체험활동들을 예약할 차례였다. 화산 공원을 못 가고, 화산을 못 걸어보게 되어서 용암을 보려면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라바(용암)보트나 화산 헬기투어 밖에 없었다. 나는 라바보트가 너무너무 타고 싶었다. 시뻘건 용암이 바다와 부딪히는 광경을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헬기는 화산을 바로 앞에 두고도 굳이 영상으로 보는 그런 느낌일 것 같아서 더 다이나믹한 경험을 하고 싶었다. 헬기보다는 보트가 당연히 싸겠지 하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알아보니 헬기와 보트의 가격은 비슷했고 새벽 4시에는 배를 타야 시뻘건 용암을 볼 확률이 높아진다고 했다. 배 멀미가 걱정이었고, 애들을 새벽 3시에는 깨워야 할 텐데 이게 가능할까 싶었다. 우비를 입고 온 몸으로 튀는 바닷물을 맞아가면서 시뻘건 용암과 마주하고 싶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욕심을 못 버리고 있는데 깔끔하게 라바보트를 포기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라바보트에 용암이 덮쳐 한 명이 크게 다치는 사고가 난 것이다. 화산 폭발해서 빅아일랜드 못 가는 거 아니냐고 했던 친구들이 이번엔 라바보트 사고 소식 링크를 대화창에 올렸다. 보트 지붕에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큰 구멍이 뚫려서 까맣게 타 있었다. 라바에 너무 가까이 간 것이 문제였다고 했다. 나와 우리 가족이 탔을 수도 있었던 보트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헬기투어를 예약할 수밖에 없었다. 빅아일랜드까지 가서 용암을 못 보고 올 수는 없었다. 1시간 헬기투어에 4인 가족 거의 100만 원이 들었다. 가장 이름 있는 회사는 너무 비싸서 두 번째로 유명한 회사로 선택했다. 예약 과정도 복잡했다.
용암을 볼 수 있을 것인가 말 것인가 아슬아슬 줄타기는 빅아일랜드에 도착해서도 계속됐다. 화산이 폭발한 지 얼마 안 되어 용암 양이 많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용암 양이 줄어 못 보고 오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제일 큰 문제는 허리케인이었다. 허리케인이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허리케인이 미리 보낸 바람 때문에 헬기가 취소됐다는 소식들이 카페에 올라왔다. 게다가 우리가 예약한 날짜는 딱 허리케인이 상륙한다는 날이었다. 회사에 전화해서 혹시 좀 일정을 당길 수 없는지 물어봤다. 안된단다. 이미 예약이 꽉 차서 옮길 수 있는 날짜가 없으며, 허리케인은 얼마든지 진로를 바꿀 수 있어서 아직 오지도 않은 허리케인 때문에 취소를 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고 했다. 팔랑귀인 나는 상담 전화받은 언니의 목소리가 확신에 차 있어서 ‘그런가? 허리케인이 비켜갈 수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취소하려면 취소해. 근데 바보 같은 짓이고 너 후회할걸.’ 이렇게 들렸다. 이번에도 제발 용암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하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드디어 헬기 타는 날! 카와모토 스토어에서 무수비와 코리안 치킨을 도시락 포장해서 아침으로 먹었다. 너무 맛있었다. 나는 뼛속까지 동양인임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어제 헬기는 바람 때문에 취소됐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헬기를 탔다.
그리고 우리가 탄 다음 날 헬기도 취소됐다.
잘생긴 조종사 아저씨의 영어는 비행기 소음 때문에 도무지 들리지 않았다. 마우나케아 별 해설 영어 이후로 여유가 생긴 나는, 정말 잘 안 들렸지만, 아이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 얘기, 내가 알고 있는 썰을 조금씩 풀어서 던져주었다. 마치 지금 조종사 아저씨가 해준 얘기인 것처럼. 푸하하. 영어는 안늘고 요령만 느는 영어선생님이다.
붕 뜰 때의 헬기 느낌은 말 그대로, 연애 초기를 묘사할 때 자주 쓰이는 ‘하늘에 붕 뜬’ 느낌이었다. 배가 간질간질했다.
나무만 봐도 참으로 아름다운 하와이에서, 하늘로 올라와 숲을 봤다.
까맣고 미끈하게 파여있는 피셜 8(fissure 8)을 봤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바다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었는데, 사람이 없고 부서지는 포말만 있는 광대한 바다가 보였다.
바다와 용암이 만나 만들어지는 스팀을 봤다.
그리고 우리는 무사히, 하늘에서, 용암을 봤다.
아주 쪼매난 용암이었다. 겨우 봤고, 모두가 호들갑을 떨었다. 사진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다. ‘에게? 이거 보려고 우리 헬기 탄 거야?’ 할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는 ‘긴 시간 동안 시뻘겋고 철철 흐르는 용암을 보는 건 바라지도 않아요. 볼 수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헬기가 뜨기만 해도 좋겠어요.’ 수준의 소박한 마음으로 이미 낮아져 있었기 때문에 너무너무 기뻤다. 돌아오는 길에 100만 원짜리 헬기를 타고 우리 똥꼬2호는 잠이 들었다. 오 마이 갓!
- 이 날 오후의 이야기는 하와이 Day 10, PM 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