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남편을 다치게 했고, 아이들은 울었고, 뒤늦게야 깨달았다.
어느 날, 남편이 아이를 훈육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정확히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남편은 아이를 방으로 데려가 훈육하려 했다.
아마 내 앞에서 훈육하는 것보다, 조용한 공간에서 단둘이 대화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남편이 아이를 때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남편의 팔을 잡아끌며 아이를 데려가지 못 하게 막았고,
당황한 아이들은 울기 시작했다.
그날 우리 가족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남편의 팔에서는 피가 났고,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남편과의 대화는 결국 몸싸움으로 이어졌고
더 이상의 대화는 불가능했다.
“이게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일이야?”
“왜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들어?”
그날이 지나고,
남편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그럴 일이냐고? 그럼! 아이를 때리면 안 되는 거지!!”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남편은 실제로 아이에게 손찌검을 하지 않았다.
그저 방으로 데려가 말로 훈육하려 했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게 맞았다.
상황을 크게 만든 건 나였다.
그렇다면
왜 나는 남편이 아이를 때릴 거라고 확신했을까?
그때 떠올랐다.
어린 시절의 나.
나는 엄마에게 혼날 때면,
늘 방으로 끌려가 맞았다.
‘방으로 데려간다’는 말은 내게 폭력의 예고였고,
내 안의 그 아이는 여전히 그 장면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과민하게 반응한 게 아니었다.
내가 예민한 게 아니었다.
나는 아직, 그 시절에 멈춰 있었다.
아빠의 알코올중독과 병으로 인한 부재,
폭언과 폭행,
가난,
동생을 돌보며 '대리 엄마'가 되어야 했던 어린 시절.
그리고 이어졌던 왕따, 집단폭행.
나는 그 모든 것이 지나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상처들은 내 안에서 여전히
반응하고, 방어하고, 울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소중한 내 가족.
내 남편, 내 아이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을 함께 살아가고 있는데,
나는 과거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나의 트라우마로 인해
그들이 슬퍼하고, 분노하고, 다쳐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내 상처받은 내면 아이를
이제는 내가 꺼내어 돌보아주기로.
그 아픔에서 꺼내
그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사람으로
다시 만들어주기로.
이 글은 그 시작이다.
내면아이를 마주하는 여정을
한 사람의 엄마로, 아내로,
그리고 상담사가 되고 싶은 나로서
조심스럽게 기록해보려 한다.
앞으로
존 브래드쇼의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에서 제안하는 방법들을
직접 삶에 적용해보며,
그 경험을 연재로 나누려 한다.
혹시 당신 안에도
외롭고 상처받은 채 말 없이 머물러 있는 어린 아이가 있다면,
이 여정이 그 아이에게 닿는 작은 길이 되기를 바란다.